Description
우리 시대의 진정한 신앙과 예술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그리고 희망!
이 원고의 출판을 망설이게 했던 이유는 첫 번째로 이 원고가 다루는 주제가 우리 사회가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종교의 문제와 신앙의 태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저자의 통찰과 문체가 너무도 예리하고 직설적이어서 종교와 예술의 종사자들에게서 커다란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저술은 개인적이지만 출판은 사회적이다. 저술은 저자의 문제이지만 책이 팔리고 읽히는 것은 출판사의 문제이다. 그러기에는 저자의 글이 다소 불편하고 초연하고 때때로는 신경질적이다. 우리는 물론 그의 글이 좀 더 우회적이고 부드럽기를 바라고 또한 좀 더 서술적이기를 바라지만 그렇다면 그의 개성의 많은 부분 또한 사라질 것이다. 타협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출판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오랜 망설임과 몇 번의 편집진 회의가 있었지만 거기에서도 팽팽한 의견의 차이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와 예술의 분석에 있어 저자는 전의 작품들에서 구사했던 간결하고 망설임 없는 고유의 문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저자는 물론 초연하다. 그는 누구도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도 않는다. 어떤 견지에서는 이 원고는 누구도 무엇도 비판하지 않는다. 저자는 단지 스스로에만 잠겨있다.
우리는 저자의 이러한 개성을 전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그는 단지 스스로의 사유와 거기에서 종합된 통찰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연함이 오히려 더 크게 우리를 비판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편집자인 나의 경우에만 해당될까? 확실히 그렇다. 이 원고를 읽으면서 계속 얻어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위선과 어리석음 속에서 살 작정인가!
저자는 현재의 종교와 예술은 모두 진정한 신앙이나 진실한 심리적 태도 위에 기초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근거를 그의 형이상학에 기초시키며 순식간에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결론으로 달려간다. 물론 현대에 유행하는 종교와 예술이 왜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논증은 매우 치밀하고 날카롭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지만 화려하고, 예리하지만 부드럽고, 간소하지만 풍부하고, 건조하지만 우아하다. 그의 글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차갑게 끓는다. 저자 고유의 논증이 매우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아마도 그의 간결하고 날카로운 문체에 있는 듯하다. 이런 문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모순되는 요소들의 완전한 장악.
그의 세상을 향한 비판에는 따스함이 있으며, 세속적 화려함에 대하여는 비판과 동시에 자기포기가 있다. 결국 그의 이번 원고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는 우리가 어떠한 것을 놓아야 하며 그렇게 함에 의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말한다. 문제는 허상의 집착에 있으며 거기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 행복으로 위안을 얻으려는 데 있다. 놓아야 하는 것은 유형적 행복이고 새롭게 추구해야 하는 것은 추구 그 자체이다.
저자는 출판사에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냈다.
“여태까지의 집필이 차가운 비난이나 완전한 자기포기에 기초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저는 단지 현대가 다다른 길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인식함에 의해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모든 시대는 중립적입니다. 현대는 안정, 신념, 자신감, 포근함을 잃었지만 가뜬함, 자유, 독립, 창조 등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떠맡았습니다. 우리가 부딪힌 것은 막다른 길이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어디에도 길은 없습니다. 그 세계는 공허에 지배 받는 사막 같은 곳입니다. 근대인은 골목길들의 지도를 그렸지만, 우리는 공허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도망치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스스로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갈대는 스쳤을 때 손을 벱니다. 움켜지면 괜찮습니다. 우리의 조건에 스치면 상처를 입습니다. 차라리 온몸으로 수용할 때 희망이 있습니다.
인간은 새롭게 얻은 혜택보다 익숙해 있는 행복의 사라짐을 훨씬 아쉬워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나 우리의 지적이고 심미적 가능성이 제시하는 바, 우리가 최선을 다한 통찰에의 노력을 할 때 우리 시대의 천재들이 가까스로 알아낸 사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결의입니다. 확실히 거기에 위안과 포근함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엄격한 진실 - 물론 이것도 상대적인 것입니다만 - 위에 기초하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은 키치적 삶 외에 어떤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 여태까지의 저의 집필의 동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번 에세이는 새로운 가능성에의 모색입니다. 저는 먼저 모든 허위의식이 일소되었다는 가정을 합니다. 그리고 이 폐허위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확실히 현대의 진정한 예언자들은 “냄비에서 물 한 방울조차 안 남기고 증발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물방울들은 마땅히 기화되어 사라지고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염된 물을 남겨둔 채로 새로운 건설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새로운 내용물을 냄비에 채우려는 시도는 헛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원래 물도 없고 냄비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희박하지만 깨끗한 공기에의 추구 가운데 살고, 그것을 향한 분투 가운데 죽습니다. 저는 깨끗한 공기를 제시하고자 하고, 그 추구에의 양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려 합니다. 따라서 이 에세이는 절망에 대한 것이 아니라 희망에 대해서입니다. 새로운 예술과 혁신된 신앙이 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어떻게 이것들을 포기하겠습니까? 생명이 있는 한.
물론 제시된 길은 “좁은 문”을 거쳐야 이를 수 있는 길이고 또한 거칠고 협소한 길입니다. 동반자가 많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것이 아니라면 저는 단지 제 신념이 몇 명의 동조자만 구해도 만족하려 합니다. 작가로서 힘든 것 중 하나는 사방이 솜으로 둘러쳐진 방에서 소리치는 것입니다.” - 조중걸
안타까울 정도로 감동적이었고 우리는 출판을 결정했다. 우리는 “몇 명의 동조자” 중 하나가 될 결심을 했다. 어떤 편집진이 이러한 메일이 동봉된 원고를 포기하겠는가. 우리 출판사는 이 책이 부디 스스로의 가치에 준하는 생명력을 얻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모든 잘못이 있다. 그래도 이 책이 살아남을 정도의 아주 작은 올바름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