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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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카메라, 내비게이션, 스마트폰, 크루즈미사일, 유튜브, 윈도우즈, 명박산성…… 비평가의 눈과 산책자의 발걸음으로 써내려간 기계문명 오디세이 21세기는 새로운 인간을 낳았다. 기계산책자. 그는 기계의 사용자이면서 거리를 둔 관찰자이고 해석자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기계문명의 무게와 소음에 얽매이지 않고 기계의 모든 감각적인 평면들 위로 유유히 산책한다. 그리고 기계를 읽어낸다. ─ '머리말' 중에서 『기계산책자』는 사진비평가로 활동하다 기계에 매혹되어 기계비평이라는 낯선 분야를 연 이영준의 본격 기계비평서이다. 이번 책은 '기계' 자체에 천착했던 이전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계'문명'에 초점을 맞춘다. 즉 기계와 인간 간의 인터페이스와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계산책자'란 이렇게 기계를 통해 인간 문명의 의미를 읽어내는 자의 이름이다. 그는 '전문가'처럼 기계 자체의 작동에만 얽매이지 않으며, 일부 '지식인'처럼 기술에 대한 무턱댄 불신을 가지지도 않는다. 그는 비평적 욕망을 지닌 기계 마니아, 즉 기계 애호가이자 비평가이다. 『기계산책자』는 이러한 비평가적인 경계에 서서 바라본 기계문명 보고서이다. 그는 내비게이션, 컴퓨터, 스마트폰 같은 일상적 기계에서부터 우주선, 미사일, 비행기 같은 거대 기계에 이르는 다양한 기계들이 어떻게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읽어내며, 나아가 감시카메라나 명박산성을 이룬 컨테이너 같은 정치 · 사회적 기계가 갖는 함의를 밝힌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기계와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현대의 삶을 구성하고 결정하는지에 대한 독창적인 통찰에 다다르게 된다. 1부 기계의 존재론: 기계-인간 인터페이스와 새로운 주체 우리는 기계가 산만하다, 사람이 산만하다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양자 간의 인터페이스인 것이다. 즉 인간과 기계, 기계와 기계의 인터페이스가 총체적으로 산만함이라는 조건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기계적 상황이다. ─ '21세기의 산만기계' 중에서 새로운 기계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낳는다. 저자는 자동차 주변기기들이나 윈도우즈 컴퓨터 등에서 한 곳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산만기계'의 탄생을 보고, '노이즈의 기계'에 대해 살피면서 근대가 인간에게 폭음과 침묵이라는 극단의 진폭을 강요하고 있음을 밝혀내며, 박물관, 건축물, 유튜브 등의 '기억의 기계'에서 오늘날 기억이 조직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한다. 또한 기계의 액체성이 주는 '액체공포'를 통해 유동성이 가져오는 불안을 발견하고, 짱돌부터 미사일에 이르는 다양한 탄체를 진열하는 가상 전시에 대한 상상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맹목적성의 기계'인 탄체에 인간의 잔머리를 불어넣게 되는지를 살핀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기계의 탄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기계의 발명자와 사용자에 머무르지 않으며, 역으로 기계를 통해 자신을 구성해내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기계는 새로운 인간-기계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내며, 이는 과거와 다른 삶의 조건으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맞닿아 있다. 2부 기계도시의 풍경: 현대 사회에서 기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동의 수단을 이용하여 이동을 막는다는 명박산성의 엄청난 모순은 우스운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담론적으로 풀어야 할 것을 토목적으로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명박산성은 역사로부터 배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내버리고 말았다. ─ '명박산성, 저열하지만 뜻 깊은 기계' 중에서 저자는 이어서 다양한 기계들이 현대 도시의 삶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파헤친다. 분석의 한 축은 기계가 어떻게 정치적 · 사회적 환경 속에서 변형되고, 또 그것이 어떻게 사회를 다시 변형시키는가이다. 한때 꺼림칙한 대상이었던 감시카메라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분석하고 나아가 어떻게 감시의 시선이 역으로 오늘날 주체의 중요한 조건이 돼버렸는지를 밝히며, 이동성의 기계인 컨테이너가 정치적 안배에 따라 군중의 이동을 막기 위한 명박산성으로 변신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식품산업과 미디어가 어떻게 먹는 주체를 수동적인 소비자로 만드는지 분석한다. 다른 한 축은 무심코 지나쳐버리곤 하는 기계들을 다시 우리 눈앞에 불러내는 것이다. 저자는 디지털 시대에 밀려나고 있는 듯한 종이가 갖는 의미를 기계비평적 시선으로 살펴보고, 카세트테이프와 탄창, 콩코드 여객기의 창 등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변화하는 풍경에 대해 성찰한다. 또한 내비게이션 시스템이 편리를 주는 동시에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순간 낯선 곳에 다다를 자유를 빼앗아갔다고 말한다. 3부 보고서라는 기계: 기계를 재현하는 것의 의미 사고는 주체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사고 직전까지 각종 데이터를 인지하고 판단하며 항공기를 조종하고 상황을 장악하고 있던 주체들은 사고가 나는 순간 희생자가 되고, 주체성은 사라지고 파편이 돼버리는 아노미 상태가 된다. 이때 사고조사보고서는 그 사태에 대한 저자로 나서서 내러티브를 재구성하고 사고의 성격과 본질을 규정하며, 사고 자체를 재연해낸다. ─ '사고조사보고서 읽기: 괌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의 경우' 중에서 마지막 두 글에서는 기계 혹은 기계가 불러온 사고를 재현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성찰한다. 미항공우주국(나사)에서 발표한 우주개발 관련 보고서를 통해, 기계를 표상하는 매체로서 그림과 사진이 벌이는 흥미진진한 경쟁을 그려내고, 나아가 칼 세이건이 디자인하고 우주선 파이어니어 10호와 11호에 실린 외계 생명체를 향한 그림 메시지가 얼마나 인간적 · 서양적 · 백인남성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폭로한다. 또한 1997년 8월 6일 괌 공항에 착륙하다 추락해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를 다룬 사고조사보고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어떻게 사고가 가져온 집단적 트라우마를 내러티브적 복원을 통해 봉합하는지를 밝힌다. 특히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풍크툼' 개념을 통해 추락 사고가 갖는 의미를 분석해내는 과정은 저자가 펼치는 기계비평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