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원으로 살아간다는 것. 희망, 좌절, 뜻밖의 반전
삼성전기 98사번 이은의 대리의 자전 에세이.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삼성의 여직원으로 살아온 12년 9개월을 글로 엮었다. 그녀는 똑부러진 일꾼이었다. 여직원이라서 답답하고 억울할 때가 많았지만, 그럴수록 인정받는 프로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 그녀를 주저앉힌 건 상사의 성희롱이었다. 회사도 동료도 피해자가 된 그녀를 외면했다. 프로가 되기 위해 애쓰던 그녀는 졸지에 무능력한 직원이 되어버렸다. 가능한 선택은 두 가지였다. 사람들의 충고처럼 적당히 참거나, 싸우는 것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후자였다. 꿋꿋이 회사를 다니는 한편,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5년여의 싸움 끝에 승소했다.
잘 나가던 영업사원, 12년차 대리에 머문 까닭은?
직장내 성희롱의 피해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처음에는 그녀도 참았다. 그러나 성희롱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울부짖었다. 여자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무슨 죄라도 되는 건지, 왜 나는 '나를 만지지 말라'는 한마디 요구도 할수 없는 건지… 그리고 인사팀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 후의 스토리는 대략 예상 가능하다. 인사팀의 문제회피, 가해자 감싸기와 부서배치에서의 불이익, 업무배제, 고과누락, 왕따 등이 차례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피해자의 눈물, 해직, 황폐해진 인생, 우리는 이런 것들을 쉬 떠올린다. 그러나 그녀의 스토리는 달랐다.
드라마도 그리지 못한 직장내 성희롱의 다른 결말
최근 방영된 드라마 「지고는 못살아」의 에피소드 중, 희수(이수경 분)의 직장내 성희롱 문제는 결국 '소송포기'로 결론을 맺었다. 에피소드에 공감하며 대리만족을 원했던 시청자들이 '결국 현실은 이런 것이냐'며 크게 실망한 것은 물론이다. 지난 8월 29일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이 조사한 '여성 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 실태조사 및 대안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2년 내 성희롱 피해를 당했다는 응답은 전체의 39.4%에 달했다. 그러나 성희롱 사건 후 피해자가 문제삼아 가해자가 해고됐다는 응답은 1.8%에 불과했고, 가해자가 부서나 근무지를 옮겼다는 응답은 4.5%, 가해자에게 피해자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경우도 2.7%에 그쳤다. 가해자가 정직, 감봉, 견직 등의 징계를 받은 사례는 아예 없었다. 반면 가해자 신상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응답은 무려 46.8%로 절반에 가까웠다.
오히려 피해자가 2차 고통을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피해자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부서나 근무지를 옮기거나(10.6%), 해고 또는 근로계약을 갱신하지 못한 경우(2.9%), 피해자 스스로 직장을 그만두거나(6.7%), 부서나 근무지 이동을 자청한 경우(14.4%)도 적지 않았다. 애초에 성희롱을 당하고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답한 사람이 78.9%에 달했다. 가해자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사과를 요구한 예는 11.2%, 상사나 고충처리기구 등 제삼자에게 알리고 조치를 요구했다는 응답은 3.7%에 그쳤다.
이 보고서를 보면 드라마조차도 극복할 수 없었을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엄혹한 현실 한편에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도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열심히 일했던 프로답게 열심히 싸우기로 다짐했다. 강단 있게, 그리고 영리하게 싸움을 해나갔다. 아무 도움도 바랄 수 없었고 더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세상에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 같은 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나는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데, 회사가 그걸 부정한다면 내가 직접 말해 주기로 결심했다.
선례라….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더니. 그들의 말이 오히려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다. 이렇게 내가 지쳐 나가떨어지듯 퇴사해버리면 그게 바로 선례가 될 터였다. 앞으로 성희롱이나 왕따를 당해서 문제제기를 하면 나를 선례로 삼아 구조조정해버리겠다는 말로 들렸다.
회사내에서의 문제제기가 아무 소용이 없자, 2007년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2008년에는 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국가인권위는 1년 6개월 만에 차별시정권고를 내렸다. 회사는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그녀는 맞받아 형사고발을 제기했다. 형사고발은 기각되었지만,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은 차례로 승소했다. 2004년 성희롱 피해자가 된 뒤 7년 만이었다.
승리의 노하우, 당당하게 지켜라!
그녀의 싸움은 그 과정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대부분의 피해자와 달리 그녀는 회사와 소송까지 불사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분쟁 와중에도 꿋꿋이 회사를 다녔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삼성'같은 대기업이 이른바 '문제사원'에 관대한 까닭일까?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 만난 나룻배와도 같았던 그 생활을 한마디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힘든 기간을 악착같이 버티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던 걸까? 오히려 그녀는 철없는 공주과, 천방지축 말괄량이였다. 그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려는 것들에 대항해 싸웠다.
회사에 남아서 싸우기로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어떤 경우에도 권리라는 것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최대한 보장된다는 것을 알았고, 증거든 증인이든 회사에 있어야 보강이 용이하고, 무엇보다도 피해 입은 개인이 떠밀려 나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과나 진급 따위는 애시당초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직장생활 전체를, 의지했던 많은 사람들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두려웠다. 지금까지 받은 것보다 훨씬 깊은 상처를 받게되리라는 걸, 이길 확률이 높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면으로 싸워서 뚫고 나가지 않으면,
이 절망감과 좌절감이 평생 따라다닐 것 같아 두려웠다.
나란히 서 있는 낯익은 빌딩들을 올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영화 「친구」의 대사를 읊조렸다. '너나 가라 하와이.' 도망치는 것도,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는 것도 너희들이나 하라고, 낮에 본 사람들과 그들 위에서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건 그냥 나를 위한 싸움이었다. 긴 시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롯이 내 의지로 하는 싸움이니, 이 싸움이 내 의지에 반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당장에라도 그만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당당했다. 그리고 힘든 싸움이 자신을 좀먹지 않도록 스스로를 믿고 사랑했다. 이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때로 슬프거나 비장하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유쾌하고 통쾌하다. 이 세상엔 이기고도 불행한 싸움이 얼마나 많은가. 반면 이 특별한 이야기는 모처럼 만난 속 시원한 승리의 기록이다. 영화 「맨인블랙II」의 마지막은 주인공들이 거대한 외계 괴물을 어렵사리 퇴치하는 장면이다. 쓰러진 외계괴물의 몸이 갈라지면서 그 괴물을 조종하고 있던 꼬마 외계인을 발견하는 느낌, 그게 그날의 느낌이었다. 막연히 두려워하던 회사가 사실은 찌질한 꼬마 외계인일 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금요일에 내 전화를 받았던 노사협의회 사무국장은 출근시간이 되기도 전에 등기로는 출마접수가 안 된다고 전화를 해왔다. 그럴 것 같아서 출장날짜를 바꿀 뻔했다고 웃으며 농담을 했는데, 왜 말을 그렇게 하냐면서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절규하듯 언성을 높였다. 자기에게 비아냥거리고 협박을 했다면서 전화기에 녹음장치가 되어 있다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며 자기가 오버했다고 사과를 했다. 부장님이 데리고 있는 N과장이 내 동태를 살핀답시고 자꾸 주변에 묻고 다닌다던데, 제 주변 사람들 불편하지 않게 다음부터는 저한테 직접 보내세요. 전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Please log in to see mor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