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Franz Kafka · Novel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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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은 공명의 문학 브랜드 스피리투스가 야심차게 소개하는 문학 시리즈다. 시대를 초월해 문학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들을 다시 호출해 누구나 알고 있는 작가지만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글文을 얻을 수 있는得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권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이다. 이 책에 실린 카프카의 소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이 말하는 소설과 동물이 말하는 소설. 이중 전자, 곧 인간이 말하는 소설은 인간 존재의 숙명적 불안과 닫힌 사회의 부조리를 전해준다. 대개의 작가들이 그렇듯 카프카에게도 자전적인 작품들이 있는데, 둘 다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전혀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는 어떤 부자父子의 이야기인 '판결'과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골 남자와 문지기와의 실랑이를 그린 '법 앞에'가 그렇다. 그런데 그 세계는 "꿈과 같은 나의 내면의 삶을 서술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을 부차적으로 만들었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함축적 은유를 통해 제시됨으로써 매혹적인 상징주의의 세계로 재창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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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판결 법 앞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시골 의사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어느 개의 연구 굴

Description

함축적 은유로 매혹적 상징주의를 창조해낸 카프카의 문학 세계! 쉽고 명료한 언어로 새롭게 번역하다 카프카여, 또 다른 변신들과 함께 우리들에게로 다시 날아온 ‘검은 까마귀’여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그레고르 잠자’가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독자들은 잠자 자신만큼이나 그 ‘변신’에 대해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충격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어서 오래도록 <변신>을 그리고 그것을 쓴 프란츠 카프카를 기억하게 한다. 그 강렬함만큼이나 <변신>은 위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이런 것을 쓰도록 허락받은 작가가 있다는 것을 몰랐구나!”라며 탄식했겠는가? 그런데 그 강렬함이 만들어낸 기억이 카프카에게는, 그리고 아직 읽히길 기다리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게는 부당하면서도 나쁜 일이 되어버렸다. <변신>만큼이나 강렬하고 위대한 작품들에게는, 그 작품들로 이루어진 ‘카프카’에게는 말이다. 카프카를 <변신>의 작가로만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 또 다른 변신들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기도 하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비웃을 수는 없다. 그런 행위는 의무를 저버리는 짓이다. 우리 중에 가장 못된 인간들이 요제피네에게 하는 가장 못된 짓이라고는 이따금 “요제피네를 보면 웃음이 사라져”라고 말하는 일뿐이다. _<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중에서 우리의 법과 제도는 모두, 그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몇 안 되고 많은 것을 잊어버렸는데, 우리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행복에서, 함께 사는 따듯한 삶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한다. _<어느 개의 연구> 중에서 믿어지는가? 저 위트로 가득한 말들이, 부드럽고 따뜻한 말들이 잔인하고 냉혹하고 처절한 <변신>의 말들을 만들어낸 카프카의 말들이라는 것이! 모든 위대한 작가들이 그렇듯 카프카의 세계는 단순하지 않다. 아니 지극히 복잡하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문득 시리즈의 첫 번째 작가 이상이 까마귀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듯 카프카도 그랬으니 말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의 성이 이미 자신의 모국어인 체코어로 ‘검은 까마귀’였으니. 친구이자 <밀레나에의 편지>의 편집자인 빌리 하스가 말했듯 “(당시의) 프라하에서 태어나지 않고 프라하에서 살아보지 않은 자는 카프카의 문학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그의 삶과 문학은 이미 충분히 복잡한 것이었다.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헤미아 왕국에서 태어나 서른다섯 살에는 같은 곳에 살면서도 체코의 국민이 되어야 했다. 그는 체코인이면서도 자신의 문학을 담기에는 충분치 않은 수준의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해야 했다. 또한 그는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대인들에게는 시오니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 몸과 마음이 쉬어야 할 집에서는 기질적으로 너무도 다른, 사업가였던 아버지와 끊임없이 갈등해야만 했다. “저는 문학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문학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라는 카프카의 저 말이 문학적 비유로서뿐만 아니라 삶을 위한 다짐으로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은 인간이 하는 일종의 진지한 농담일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삶은 그로 하여금 농담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문학을 하고자 했고, 그래서 그는 농담이 되기로 했다. 검은 까마귀의 눈으로 벌레로부터 원숭이, 개, 두더지를 거쳐 쥐로 이어지는 변신들을 통해 그는 농담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자신의 말마따나 문학 그 자체가 되었다. 저마다 한때 <변신>과 함께 기억 속으로 날아갔던 ‘문학 그 자체’가 다른 변신들을 데리고 우리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로소 카프카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조심스레 권해본다. 우리들에게로 다시 날아온 ‘검은 까마귀’를 위해, 그의 또 다른 변신들을 위해, 무엇보다 가녀린 몸으로 “거의 모든 생명력을 짜낸다는 듯” 노래하는 요제피네라는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농담을 위해. 문득은 공명의 문학 브랜드 스피리투스가 야심차게 소개하는 문학 시리즈다. 시대를 초월해 문학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들을 다시 호출해 누구나 알고 있는 작가지만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글文을 얻을 수 있는得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문득 시리즈는 이상과 프란츠 카프카에 이어 에드거 앨런 포, 허먼 멜빌, 세르반테스, 김동인, 현진건, 채만식 그리고 김유정 등 누구나 알고 있는 작가지만 한 번도 읽을 수 없었던 그들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새로운 장이 되고자 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의 내용 및 특징 인간 존재의 숙명적 불안과 닫힌 사회의 부조리를 함축적 은유로 그린 매혹적 상징주의의 세계 이 책에 실린 카프카의 소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이 말하는 소설과 동물이 말하는 소설. 이중 전자, 곧 인간이 말하는 소설은 인간 존재의 숙명적 불안과 닫힌 사회의 부조리를 전해준다. 대개의 작가들이 그렇듯 카프카에게도 자전적인 작품들이 있는데, 둘 다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전혀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는 어떤 부자父子의 이야기인 <판결>과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골 남자와 문지기와의 실랑이를 그린 <법 앞에>가 그렇다. 그런데 그 세계는 “꿈과 같은 나의 내면의 삶을 서술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을 부차적으로 만들었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함축적 은유를 통해 제시됨으로써 매혹적인 상징주의의 세계로 재창조된다.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과 인간의 삶에 대한 희망을 전하는 복화술 카프카는 인간 존재의 숙명적 불안과 닫힌 사회의 부조리를 함축적 은유를 통해 그려낸 작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흉측한 벌레뿐 아니라 원숭이, 개, 두더지 그리고 심지어 쥐로 추정되는 존재들로 나타난다. 카프카는 흉측한 벌레로 ‘변신’한 이후에도 다양한 종족으로 변신해가며 끊임없이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이렇듯 카프카가 우화적 모티브를 채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화, 정확히는 동화에 대한 그의 관심 때문일 것이다. “피비린내 나지 않는 동화란 없습니다. 동화란 어느 것이나 다 피와 불안의 심처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이것이 모든 동화의 유사성입니다. 표면은 다릅니다. 북유럽의 동화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동화같이 풍부하고 공상적 동물상으로 차 있지는 않으나, 알맹이인 동경의 깊이는 같은 것입니다.” 카프카는 ‘공상적 동물상’을 통해 ‘피와 불안의 심처’를 드러내려 했고, 동시에 무언가에 대한 ‘동경의 깊이’를 추구했다. 하지만 이는 모순되는 것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었다. 카프카는 이 모순됨, 즉 피와 불안으로 이루어진 존재를 그리면서 동시에 그 존재에 대한 동경, 애정을 표현하는 일의 모순됨을 극복하기 위해 ‘공상적 동물상’을 끌어왔고, 이들의 눈과 입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과 인간의 삶에 대한 믿음, 정확히는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마치 다른 목소리로 말하는 복화술처럼 말이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는 인간의 것 중 악수를 처음으로 배운 원숭이 ‘빨간페터’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을 “저와 전혀 어울리지 않고, 건성으로 어떤 원숭이한테서 따온 이름”이라고 규정한다. 이름은 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오지 않는 미래가 아닌, 지나가고 있는 현재가 아닌, 과거를 통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인간들은 그 과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구상에 걸어 다니는 모든 생물체는 원숭이 시절을 뒤꿈치를 간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