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너머에는 지구의 오랜 기억이 존재한다.
화석에서 행성적 컴퓨팅까지,
미디어 철학의 지평을 지구 행성으로 확장하다!
전선과 데이터, 폐기물과 먼지―기술의 계보학은 땅에서 시작된다.
최근 중국이 미국의 관세 전쟁에 맞서 희토류 카드를 꺼내자마자 상황이 일거에 반전되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40년에 걸쳐 치밀하게 희토류 공급망을 구축해 온 중국의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백기를 들어야 할 형편이다. 중국은 희토류가 모든 미디어와 첨단기술에 궁극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미디어의 지질학』은 핀란드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미디어 이론가인 유시 파리카가 미디어에 관한 급진적인 사유를 제시하는 책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미디어는 단지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아니다. 이 책은 희토류 금속, 실리콘, 광물, 유해 폐기물과 같은, 미디어를 구성하는 물질적 기반을 통해 기술과 자연의 얽힘, 지구와 정보의 공진화, 디지털 자본주의의 추출 경제학을 추적한다. 디지털은 공기 중에 부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기술이 만든 전자 폐기물의 생태학부터, 산업 이전의 지질학적 축적까지, 그리고 구리와 콜탄, 리튬과 실리콘으로 이뤄진 지질학적 물질이자, 수억 년에 걸쳐 생성된 심층 자원의 응축물이다. 지질학과 생태학, 기술철학, 미디어 이론을 횡단하는 새로운 비판 정신으로 윤리적 사유와 감각적 사유를 동시에 자극하는 이 책은 미디어고고학, 생태적 미디어 이론, 물질성의 철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더없이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지층 위의 철학: 미디어 이론의 지평 확장
『미디어의 지질학』은 철저히 물질적인 텍스트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형이상학적이다. ‘기술이란 무엇인가’, ‘정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세계를 인식하는가’, ‘장치의 물질성은 비인간적 영역과 인간적 영역 사이를 어떻게 매개하는가’와 같은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파리카는 미디어를 단지 기계적 장치가 아닌 감각과 지각, 시간과 공간을 형성하는 기술적 장치로 본다. 그는 지층적 물질성과 더불어, 미디어가 어떻게 세계를 서술하고 기억하고 구성하는지 분석하면서, 미디어 이론을 철학, 생태학, 지구과학, 예술 이론에까지 확장한다. 이러한 이론적 작업은 미디어 연구의 방법론 자체를 갱신한다. ‘이미지’나 ‘코드’를 분석하던 기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미디어의 사물성, 지구성, 환경성을 중심으로 사유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철학이 더는 추상적 개념어가 아니라, 지층 위에 놓인 돌과 흙의 언어로 다시 기술된다.
미디어의 물질성과 지질학적 시간: 심원한 시간으로부터의 사유
스마트폰, 컴퓨터, 서버, 인공지능 등 우리가 흔히 디지털 미디어라고 부르는 것들이 가벼운 무형의 신호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기 쉽지만, 유시 파리카는 정반대의 질문을 던진다. 미디어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그는 이 질문을 단순한 비유가 아닌 물질적 실재로 되돌린다. 『미디어의 지질학』은 미디어를 지질학적 기원의 산물로 파악한다. 즉, 미디어를 구성하는 실리콘, 리튬, 콜탄, 희토류 금속들은 지구 내부에서 수백만 년에 걸쳐 형성된 광물 자원이다. 여기서 ‘심원한 시간(deep time)’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파리카는 우리가 사용하는 미디어 장치가 단지 산업혁명 이후의 산물이 아니라,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 속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각은 ‘기술 진보’ 중심의 기존 미디어 담론을 비판적으로 전복하며, 미디어를 자연과 인간, 시간과 물질이 교차하는 지층적 현상으로 재구성한다. 미디어는 정보 이전에 ‘돌’이며, ‘광물’이며, ‘지층’이다. 미디어를 지질학의 시간으로 되돌려 읽는 것은, 그 기원을 묻는 동시에 디지털 기술의 미래를 지구 행성적 차원에서 재고하는 사유 방식이기도 하다.
기술과 자연의 얽힘: 생태적 미디어고고학
파리카는 기술과 자연, 인공물과 지구환경이 서로 분리된 이항적 구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기술을 ‘인간의 것’, 자연을 ‘비인간의 것’으로 구분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스마트폰 하나를 구성하는 물질만 보더라도, 그것은 지구에서 채굴된 금속과 광물로 이루어진 완전한 자연물이다. 이는 미디어의 역사를 기계적 진보나 통신 기술의 발전사로만 읽지 않고, 환경적·지질학적 조건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해하자는 제안이다. 예컨대 파리카는 동시대 미디어가 거대한 추출 기반 자본주의에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콩고에서의 콜탄 채굴과 희토류 생산의 지정학적 맥락을 분석한다. 결국 이 책은 미디어를 둘러싼 자원, 노동, 폐기물, 글로벌 차원의 불균형 구조 등을 모두 아우르는 확장된 미디어 환경의 정치적 비판서로도 읽힌다.
폐기물과 잔해로서의 ‘좀비 미디어’라는 재귀적 유령들
디지털 시대는 늘 ‘최신 기술’을 향한 속도와 진보로 설명되지만, 파리카는 그 반대편을 들여다본다. 바로 무대에서 퇴장한 미디어, 계획적으로 구식화된 미디어, 버려진 장치, 폐기된 기술, 즉 재귀적 유령들이다. 파리카가 ‘좀비 미디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미디어고고학이라는 신생 분야에서 선물과도 같은 놀라운 사유를 개진한다. 그는 미디어 이론이 더는 미래지향적 전망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미디어의 또 다른 본질은 지속적으로 쌓이는 잔해와 폐기물이다. 스마트폰, CRT 모니터, 플로피디스크 등은 모두 한때 최신의 기술적 산물이었지만, 머지않아 전자폐기물로 전락한다. 『미디어의 지질학』은 이들 폐기물을 단순한 산업 부산물이 아니라, 지구 생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질학적 요소로 읽는다. 또한 버려진 기술들이 새로운 창작과 사유의 장으로 다시 회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겨진 것들에 대한 사유는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다른 감각을 요청한다.
* <표지 이미지> 설명: 19세기의 영국 지질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헨리 드 라 베슈가 그린 〈끔찍한 변화(Awful Changes)〉라는 풍자화. 미지의 미래 시공간을 배경으로 초고도의 지능을 갖춘 이크티오사우루스 고생물학 교수가 해양 파충류들의 집회에서 화석 인간(인류)의 신체적 결함을 강의하는 장면. 그림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덧붙여져 있다. “여러분은 이 두개골이 하등 동물에 속한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빨은 매우 작고 턱의 힘은 보잘 것 없어, 이 생물이 어떻게 음식을 얻었을지 정말 놀랍습니다.”(본문 242~3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