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의 판금 조치를 불러온『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원형이 된 소설
『물처럼 단단하게』드디어 한국어판 출간!
루쉰 문학상, 라오서 문학상 수상작가 옌롄커 대표 장편소설
낮에는 뜨거운 혁명의 언어, 밤에는 부드러운 사랑의 밀어
“당신이 믿든 안 믿든,
당신을 위해 나는 죽어도 청강에서
혁명을 일으킬 것이고 반드시 청강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거요.”
억압된 욕망이 낳은 혁명의 시대, 혁명적 사랑 ― 『물처럼 단단하게』
1967년, 문화대혁명이 한창 기세를 높이기 시작하던 때에 25살의 인민해방군 군인 가오아이쥔은 4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고향인 허난성 뤄양의 청강진으로 돌아온다.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애정 없이 결혼한 아내와 두 아이가 그를 서먹하게 맞이하고 마을의 권력가인 장인은 그에게 결혼 당시 약속했던 간부 자리를 주지 않은 채 냉대한다. 낙후된 고향에서 당의 새로운 정신에 따른 혁명을 실천하고 장인 대신 간부가 되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그의 앞에 친구의 아내이자 전임 진장의 며느리인 아름다운 샤훙메이가 나타난다. 각자의 가정은 잊은 채 순식간에 둘은 위험한 사랑에 빠져들고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긴다. 한편 자신들의 장인과 시아버지가 정점으로 있는 청강진의 구체제 간부진을 몰아내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젊은 피의 세대교체를 목표로 청강 대대 혁명동원회라는 이름의 비밀 집회를 열고 그 첫 시도로 청강진의 문화유적인 북송 유학자 정이, 정호 형제의 사당과 고서적들을 불태워 봉건주의 계급의 사상과 세력의 상징을 몰아내려 하는데…….
“이것을 쓰면서 작가로서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 맹렬히 벽에 부딪혔다. 마치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 결과, 생명력과 의지로 가득한 작품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옌롄커)
『물처럼 단단하게』는 1979년 단편 「천마 이야기」로 데뷔한 이래 30년 이상 강고하게 쌓아올린 옌롄커의 문학 세계에서 『일광유년』, 『딩씨 마을의 꿈』, 『즐거움』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장편소설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계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기이하고 기형적인 형태의 혁명이었던 1960~7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욕망과 야망을 불태운 두 남녀가 거침없이 구시대적 사상, 문화, 풍속을 척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혁명은 욕망의 촉매제인가? 욕망은 혁명의 도화선인가? 문화대혁명이라는 ‘붉은 악몽’ 속에서 인간의 억압된 원초적 욕망은 순식간에 사회적 야망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이 작품은 장대한 분량 속에서 전반부는 하층 계급에서 벗어나고자 모반을 꾀하며 권력욕과 성욕이 결합되는 과정을 그리고, 후반부에 와서는 그들이 더 큰 권력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은밀한 희생양이 되는 파국을 보여준다.
연약하고 단단한 ― 권력욕과 애욕은 서로 결합하고 배척하고 의지하고 모반한다
이 소설은 주제와 형식면에서 두 가지의 극단적 구조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 세계는 남자와 여자이며, 밤과 낮이고, 사랑과 죽음이며, 국가와 개인이고, 지상과 지하이자, 협력과 배신이다. 한쪽은 삶, 혁명, 정치, 권력, 인민 등 위대한 마오쩌둥의 붉은 이름으로 가득 찬 양(陽)의 세계이고 다른 한쪽은 묘지, 땅굴, 정욕 등 음(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혁명가곡’에 의해 촉발되는 충동적인 욕망만이 이 두 세계를 연결시켜준다. 이러한 부분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선전 선동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던 혁명과 사랑의 서사에 대한 패러디로써 작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장치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과 사랑은 문화대혁명 시대에는 문학에서 다루기가 애매한 주제였다. 그나마 사랑은 있었지만 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성이 삭제되고 그 자리를 혁명애에 기반한 동지 간의 정치적 연대와 신뢰가 대신 들어서곤 했다.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에 의해 행해졌던 여러 중요한 언설들이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가오아이쥔과 샤훙메이의 대화를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변주된다. 연인 간의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서도 그들은 국가적 사상과 정치적 수사에 의존하고, 마오쩌둥과 공산당을 향한 충성 서약과 남녀의 영원한 사랑의 언약은 동일한 맥락, 동일한 언어로 취급된다. 이 소설은 문화대혁명의 중국 사회가 잉태해낸 괴물의 본질을 재해석해내 당대 중국 문학의 ‘문혁 서사’가 갖는 한계를 깨고 이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작가는 고도의 언어적, 형식적 실험으로 ‘단단함’과 ‘연약함’ 간의 기묘한 변화를 보여주고 이를 통해 정치권력의 거대한 목소리를 해체하고, 광명의 지상 세계에 숨겨진 허위와 황당함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폭로하며 그 연약한 본질을 드러내 보인다. 작품 안에서 배치된 온갖 정치적 발언과 재현 형식은 때로는 한국 독자 입장에서는 다소 읽기를 방해할 수도 있을 만큼 밀도가 높지만 혁명 담론과 사적 욕망의 언어가 뒤엉켜 만들어내는 이러한 불협화음이야말로 『물처럼 단단하게』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자 문학적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