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분서 시리즈 초기 명작!
죽음의 화신처럼 보이는 여자.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녀의 손에는 죽음이 들려 있었고, 그녀의 핸드백에도 죽음이 담겨 있었다. 38구경과 니트로글리세린이 담긴 병이라는 형태로. 그녀는 형사실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스티브 카렐라를 기다린다.
버지니아 도지는 스티브 카렐라의 머리에 총알구멍을 내고 싶어 한다. 스티브 카렐라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87분서의 형사 전부를 죽여도 상관없다. 총과 니트로글리세린 병으로 무장한 그녀는 형사실에서 조용한 오후를 보낸다.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형사실에 억류된 형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음을 맞으러 돌아올 스티브 카렐라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언제 형사실로 돌아올지 모르는 스티브 카렐라를 기다리는 형사들은 인질극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낸다. 한편, 자살 사건을 조사하러 간 카렐라는 밀실이라는 벽에 부닥친다. 자살일까, 타살일까. 인질극과 밀실 사건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건이 교차 병행하며 진행되는 이 작품은 전편에 긴장감이 넘친다. 아내와의 약속으로 형사실로 빨리 돌아가야만 하는 스티브 카렐라와 형사실에서 그를 죽이기 위하여 기다리는 악녀.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건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권력의 사용과 남용에 관한 이야기
해결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폭력을 통해서든 재원과 연줄이라는 부를 통해서든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사용과 남용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인질극이기도 하며 소품으로서의 밀실 트릭 소설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조화를 이룬다.
“밀실 미스터리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은 여기에 없었다.”
에드 맥베인은 87분서 시리즈 초기 명작으로 알려진 『살의의 쐐기』에서 인질극과 밀실이라는 완전히 다른 미스터리 장르를 병행하여 이야기를 끌어간다. 메인이 되는 인질극과 교차되며 진행되는 밀실 사건은 어찌 보면 부차적인 스토리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밀실 트릭은 완전히 고갈되었다고 선언한 미스터리 비평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맥베인은 단순하지만 깔끔한 트릭을 선보인다. 인질극으로나 밀실 사건으로만 읽어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하루의 오후 동안 일어나는 두 사건은 분량이 짧은 만큼 작품 전반에 긴박감이 넘치며 결말은 예측하기 힘들다. 형사실에서 초조하게 형사의 죽음을 기다리는 여자와 죽음을 맞으러 빨리 형사실로 돌아가야 하는 형사의 이야기가 아이러니하다.
경찰 소설의 효시
경찰 소설의 기원을 정확히 따진다면 에드 멕베인을 경찰 소설의 효시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경찰 소설이라는 것은 적어도 실제적인 경찰활동에 대한 전문적인 묘사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메그레나 프렌치, 모스 경감이 등장한다고 해서 경찰 소설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멕베인의 작품에는 매 작품마다 경찰 활동의 전문성을 엿볼 수 있는 실제 자료들이 나온다. 몽타주, 검시 보고서, 형사들의 근무표, 총기에 관한 보고서 등등이 그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추리소설의 기원이라고 볼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포를 추리소설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에드 멕베인이 경찰 소설이라는 추리소설의 하위 장르를 확립시켰다고 해서 반대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에드 멕베인은 자신이 확립한 경찰 소설이란 장르에 대해 스스로도 어떤 자부심을 느꼈는지 그의 소설 내에서 가끔 그런 의식이 표출되기도 한다.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나는 다른 작가가 쓴 경찰 소설은 읽지 않는다. 겸손하지 못한 말이지만 세계의 어떤 경찰소설 작가한테도 배울 것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나한테 배워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작가들로서는 불쾌할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87분서 시리즈 중에서 걸작을 한 편을 꼽으라고 하면 이상하게도 한 작품으로 모아지는 작품이 없는 편이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제각각 다른 작품들을 꼽는다. 이렇듯 87분서 시리즈의 특징이자 매력, 혹은 단점은 한 작품 한 작품보다도 시리즈 자체를 읽는다는 데 더 큰 매력이 있다. 한 편 한 편이 전부 재미있다는 보장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한 등장인물들이 유기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휴먼드라마로서만 읽어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멕베인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매우 섬세한 묘사에 있다. 평범한 미국인들의 지극히 현실감 넘치는 유머 섞인 대화와 사람들의 머릿속을 그대로 드러내어 종이 위에 펼쳐 놓은 듯한 세밀한 필력은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