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로서의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
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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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해석인류학과 상징인류학을 이끌었던 클리퍼드 기어츠의 후기 대표작 <저자로서의 인류학자>가 국내 초역되었다. 기존의 인류학이 문화를 과학적으로 조사해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방안에 몰두해왔다면, 이 책은 세계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달라지고 있고 달라져야 하는 인류학의 성격을 메타적으로 성찰한다. 인류학이 단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는 과학이 아니라 다층적 해석을 유도하는 문학적 글쓰기라는 주장은 당시 과학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학계에 경종을 울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기어츠는 이 책으로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분석력, 보기 드문 문장력을 인정받으며 1989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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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서문 5 1 그곳에 있기: 인류학과 글쓰기의 현장 9 2 텍스트 속의 세계: 『슬픈 열대』를 읽는 방법 37 3 슬라이드 쇼: 에번스프리처드의 아프리카 슬라이드 65 4 목격하는 나: 말리노프스키의 후예들 93 5 우리/우리 아닌 자: 베네딕트의 여행 127 6 이곳에 있기: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삶인가? 161 주 185 인명 소개 195 클리퍼드 기어츠 연보 209 옮긴이의 말 213 찾아보기 221

Description

인류학에서 “저자란 무엇인가?” 20세기 후반 해석인류학과 상징인류학의 기수 인류학을 인문학의 중심무대로 끌어올린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후기 대표작 ▶ ‘전문가 행세는 끝났다’-식민주의의 종식 이후, 변화된 시대의 새로운 인류학적 앎을 위한 기획 ▶ ‘인류학은 문학적 글쓰기의 일종이다’-인류학이 추구해온 과학적 인식론에 도전하는 신호탄 ▶ 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등 인류학 텍스트에 담긴 문학적 상상력 분석 “인류학 분야에서 저자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우리에게 말하는 이의 문제는 아직도 무척 중요하다.” -클리퍼드 기어츠 인류학 텍스트의 ‘저자’와 인류학적 ‘글쓰기’를 문제삼다 19세기 후반, 에드워드 타일러, 루이스 모건, 프란츠 보아스, 에밀 뒤르켐 등 인류학의 창시자들이 새로운 인류학 문제를 공론화하고 문화의 과학적 연구방법을 제안한 이래, 인류학은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비교하고 설명하는 길을 모색해왔다. 토착민 사회의 모습을 이른바 문명사회에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하기?이것이 인류학자들에게 주어진 제1의 과제였다. 이 과제의 수행은 인류학자가 자기 고유의 시각이나 표현을 지우고 서로 다른 세계를 중개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여겨졌다. 기어츠는 기존의 정언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대신, 질문이 전제하는 중심축을 이동시킨다. ‘그곳에 있기’라는 인류학자의 체험과 ‘이곳에 돌아와 쓰기’라는 인류학자의 과제를 투명하게 잇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인류학적 담론의 성격이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인류학은 그러한 과학적인 담보를 통해서만 신빙성을 얻을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기어츠는 부정적으로 응답하는바, 인류학자들의 조사 경험을 내보이는 글쓰기가 애초부터 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 논지는 그에게 해석인류학의 일인자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던 『문화의 해석』에서 제기했던 문제, ‘문화는 텍스트이며 인류학자는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자’라는 주장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극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그는 이 주장을 외부의 시선이나 개념으로 풀어내기보다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과학도 문학도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는 과학이기도 하고 문학이기도 한) 인류학적 글쓰기에 직접 참여하면서 증명해나간다. 그 첫걸음은 미셸 푸코의 「저자란 무엇인가?」와 롤랑 바르트의 「저자와 작가」를 암시하는, 인류학에서 “저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기어츠는 (저자 기능이 사라진) 과학과 (저자 기능이 살아 있는) 문학을 구분하는 푸코의 이론을 지지하며 인류학 저술이 문학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한편, 단지 저서 한 권을 저술한 것 이상의 영향력을 미친 저자들, 즉 하나의 이론?전통?학문 분야를 세운 인류학자-저자들을 비평해나간다. 그 대상이 바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에드워드 에번스프리처드, 블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루스 베네딕트이다. 언어의 극장을 건설한 인류학자들-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기어츠는 레비스트로스와 그의 저서 『슬픈 열대』를 첫 분석 대상으로 삼아, 가장 문학적이고 자기지시적인 텍스트를 저술한 저자-인류학자라는 맥락에서 조망한다. 기어츠가 보기에 레비스트로스는 경험과 실재의 연속성이라는 원리를 거짓으로 간주하고, 실재에 도달하려면 경험을 부정해야 한다고 여긴 독창적인 인류학자다. 이러한 믿음 아래 그는 토착민의 삶을 분석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자신이 받은 문학적 인상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차라리 독자가 자신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기어츠는 레비스트로스의 업적이 투명한 재현이 아니라 지시하는 텍스트와 지시된 세계를 도착적으로 맞대어 붙인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곳의 삶을 이곳 사람들에게 번역해주는 대신 그곳의 삶이 남겨놓은 재료들을 재배치하여 공식적인 체계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학적인 작업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번째로 기어츠가 주목한 인물은 영국의 사회인류학을 이끌었던 에번스프리처드이다. 그의 글에는 그가 ‘그곳에 있기’를 수행하는 두 가지 방식, 즉 행동자로서 참여하는 방식과 관찰자로서 개입하는 방식이 모두 드러난다. 그는 언어 문제와 어려운 작업 여건과 편견을 극복하고, 이 두 가지 방식을 대담하게 활용한다면, 다른 삶을 이해하는 ‘지각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토착민들과 자신이 대단히 다르게 보일지라도 그 차이는 결국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눈부실 만큼 명료하고 객관적인 그곳의 삶에서 밝혀내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어츠는 에번스프리처드의 텍스트야말로 역설적으로 현재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류학 텍스트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우리 앞에 나타난 현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의 문제는 인식론적 우울증이라 할 만큼 만연해진 불확실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생활방식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것이 실제로 그런지 어찌 알 수 있는가 하는, 확신 없는, 극심한 내면적 불안감.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인류학이 직면한 위기이다. 세번째 분석 대상은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이 참여적 관찰자였으며 그 종족의 일원이 되어 지냈음을 보여준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다. 그는 심리적인 문제를 다스리고 토착민의 삶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어야 현지조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구자의 심리적인 불편함과 두려움을 해결하면 증명하지 못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곳에 있기’의 원형을 직접 수행한 인물이다. 그러나 기어츠가 보기에 ‘그곳’에서 겪은 것을 ‘이곳’에서 소용되는 말로 옮겨오는 경로의 문제는 해소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심화된다. 그 문제는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많은 인류학자-저자는 스스로 문제삼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저자의 설명을 믿을 수 있게 하는 ‘고백’의 전략을 택한다. ‘고백’을 통한 텍스트 구축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기어츠의 렌즈가 보여주는 것은 ‘그곳’의 모습이 아닌 저자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지워지지 않고 더 또렷해졌다. 마지막 분석 대상인 베네딕트는 현지조사보다 자료조사에 충실했던 인물로, 문화를 객관적으로 해부했다는 평을 받아온 인류학자이다. 그러나 기어츠는 기존의 이해와 반대되는 해석을 내놓는다. 베네딕트 글쓰기의 특징이 철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인 설명이나 건조한 부연이 아니라, 스위프트 못지않은 풍자라는 것이다. 풍자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자리를 뒤바꾸는 병치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멀고 낯선 것은 친숙해지고 가깝고 익숙하던 것은 낯설고 이상해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저서가 바로 『국화와 칼』이다. 이 책에서 베네딕트는 일본과 일본인이라는 수수께끼를, 괴상한 사람들과 괴상한 장소라는 인상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함으로써 풀어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와 상상 속 그들 간의 대비를 극대화하고, 미국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의 첨예한 대비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기어츠의 베네딕트 해석은 과학적 기술과 문학적 장치의 기준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독자를 인식의 불확실성 속으로 밀어넣는다. 문학적 상상력, 인류학의 생명력을 다시 일깨우는 곳 물론 이 인물들이 위력을 발휘했던 시대에 인류학은 과학이라는 외투를 둘러쓰고 문학적 상상력이나 장치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달라진 현실이 문제가 된다. 식민주의의 종식, 세계 정치문법의 변화, 고립된 세계와의 접속은 인류학자로서의 역할과 인식 또한 바꾸었고, 기존의 연구 방식으로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학이라는 학문과 저술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기어츠가 인류학을 문학적 측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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