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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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과학자들은 사회 현상을 숫자로 말하길 좋아한다. 1:99, 20:80. 최근 부의 양극화를 가리키는 지표로 자주 오르내리는 숫자다. 숫자는 현실의 심각성을 단박에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흔히 그 숫자를 구성하거나 몸으로 사는 사람의 면면을 가리거나 놓치게도 한다. 근대 학문으로서 사회학이 말과 숫자의 실증적 학문으로 출발한 까닭에, 여전히 말과 숫자로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방법을 최선으로 여기는 연구 풍토에서 25년의 시간을 거치며 ‘조금 다른’ 사회학을 시도한 이가 있다. 사회학자 조은. 그는 2003년에 6·25 때부터 시작되는 50년의 ‘기억 여행’을 털어놓은 <<침묵으로 지은 집>>이란 장편소설을 내놓더니, 2009년에는 1986년 철거 재개발 지역에서 쫓겨난 정금선 할머니 가족을 22년간 추적한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를 내놓으며 사회학 하기의 영역을 확장해 왔다. 그의 ‘조금 다른’ 사회학은 학술서에 머물지 않은 탓에 그에겐 교수라는 직함 말고도 작가, 감독이란 호칭이 따라붙는다. 올해 동국대학교에서 교수직 정년을 맞은 그는 1986년에 사당동에서 처음 만난 한 가난한 가족을 25년 동안 따라다닌 이야기를 <<사당동 더하기 25>>란 책으로 갈무리했다. 현장 연구 조교들의 일지에서 시작해서 수없이 많은 메모, 인터뷰, 녹취, 영상물 테이프 등이 바탕이 되어 탄생한 이 책은 1988년 발표된 연구 보고서 <재개발 사업이 지역 주민에게 미친 영향>, 1992년 펴낸 첫 학술 공저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 2009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되어 이후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은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를 잇는 작업물이다. <<사당동 더하기 25>>는 한국 근대화,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도시빈민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빈곤을 겪어 보지 않은 사회학자가 연구 대상일 뿐이던 한 빈곤 가족을 4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빈곤을 연구한다는 것이 지니는 의미를 자문하는 작업으로, 25년간 가난이라는 ‘현실의 재현’과 ‘두꺼운 기술’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한 궤적을 보여 주는 문화기술지다. 여기엔 “한국 사회의 가난을 들여다보는 사회학자의 입장, 연구 과정의 변화, 연구자와 연구 대상 간의 관계와 움직임, 그리고 연구자의 자기 성찰 지점”이 담겨 있다. 지은이는 연구 사례 가족과 지은이 가족이 “짝을 맞추듯 같은 세대”라는 것을 사례를 지켜본 지 10년이 지나서야 인지할 정도로 연구자와 연구 대상을 엄격하게 분리하며 두 세계를 오갔다. 다시 그로부터 2년이 지나 한국 사회의 풍요를 경험한 ‘다른 세대’ 대학생들에게 ‘도시빈민’ ‘불량 주거지’ ‘철거 재개발’ ‘달동네’라는 사회 현실에 대한 감을 전달하려면 영상이 더 효과적인 학습 매체일 수 있음을 감지하고 애초에는 수업용 자료를 만들 생각에 이 가족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이 작은 시도는 이후 이 가족 3세대에게 필리핀 결혼 이주 여성이 합류하게 되면서 본격 다큐멘터리로 진화한다. 이 가족이 사당동을 떠난 지 십 년이 되던 1998년 12월부터 시작된 촬영은 10년간 이어져 2009년 <사당동 더하기 22>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정리되었고(부록 DVD 참조), 카메라는 다섯 번째 촬영 주자에게 넘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여관찰에 동영상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D씨 가구로 불리던 심층 연구 표적 사례 가구는 금선 할머니, 수일 아저씨, 영주 씨, 은주 씨, 덕주 씨 등 실명의 연구 참여자로 바뀌었다. 2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1986년에 64세이던 월남 피난민 금선 할머니는 세상을 달리했고 38세 수일 아저씨는 빚을 얻어 연변 조선족 아내를 맞았다가 이혼당한 후 잠시 동거하던 여자와도 사별해 혼자 살고 있고, 13세 영주는 필리핀 아내를 맞아 아이를 낳고 다문화 가정을 꾸렸고, 10세 은주는 청각 장애가 있어 이런저런 일을 하며 아이 셋의 엄마가 되었고, 7세 덕주는 감방을 세 차례 들락거리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여러 일을 전전하다 스포츠 복권 200만 원 당첨을 계기로 돈을 조금씩 불려 동네에서 작은 헬스장을 운영하고 있다. <<사당동 더하기 25>>는 한국 사회학에서 질적 연구 방법의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교과서다. 연구자의 이율배반성, ‘개입’과 객관적 관찰‘의 경계, 연구 현장의 젠더와 계급성, 익명성의 배반, 재현 등 여러 사회 과학이 현장에서 대면하게 되는 딜레마를 가감 없이 보여 준다. 연구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담보해야 하는 탓에 현장 조교들이 연구가 끝날 때까지 빈민 운동 하는 친구들과 자료, 정보를 공유하지 않도록 ‘지도 편달’해야 하는 연구 책임자의 상황이나, 전쟁터 같은 철거 현장이 무서워 그 현장에 가지 못했다는 토로, 현장 연구 조교들이 날로 치솟는 철거 ‘가옥주 딱지’를 사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연구자의 윤리를 지켜 주기를 바라는 상황, 25년이나 한 가족을 따라다니면 연구자의 자리에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 지키기’나 너무 다른 언어를 쓰고 있어 이 가족을 인터뷰할 때 쓸 단어를 골라야 하는 어려움, 연구 참여 가족이 무탈하게 지내기를 바라면서도 극적인 사건이 안 생기나 하는 이율배반적 속내를 드러낸다. “문화기술지란 자기의 연구 주제(예를 들면 가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주제의 사람들(즉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뭔가 배워 가는 것’이라는 기본을 때로 잊어버리거나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76쪽)고 고백한다. 한편 현장 연구 조교들이 ‘부부 위장 간첩’으로 신고되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는 일도 벌어졌는데 그때 불려간 조교들이 반복해서 자술서 쓰는 방식은 구술 생애사를 녹취하고 있던 지은이에게 구술 생애사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러 차례 채록한 이 가족이 구술한 생애사에서 추스른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현실을 드러내려고 애를 썼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기억에서 지워 버렸을지도 모르는 1980년대 ‘산동네’ ‘달동네’ ‘별동네’ 풍경이 선선히 들어온다. 북어를 찢는 할머니들과 소독저를 마는 아이들도 보이고, 사건이 없을 때는 화분이 옹기종기 놓인 평화롭고 한적한 골목과 그 좁은 골목 사이 담장 안으로는 여러 식구가 모로 누워 ‘칼잠’을 청해야 하는 단칸방과 좁은 부엌을 채운 세간이 보인다. 담장 너머로 전기세, 수도세를 놓고 한 지붕 여러 가구가 벌이는 악다구니, 산꼭대기 넓은 공터에서 벌어진 돈내기 고스톱, 윷놀이, 장기에 열중인 사람들과 고스톱판을 사진 찍어 보상금을 타 내려는 남자의 실랑이, 아내를 때리거나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골칫거리’ 남자들의 술주정이 쟁쟁거린다.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루핑이 타며 나는 고약한 악취와 집에 밴 가난의 냄새가 코끝을 건드린다. 금선 할머니 가족을 비롯해 이 책에 등장하는 가난한 이들의 삶의 이력은 곧 한국 근현대사다. 분단, 재개발이란 자본주의적 공간의 재편, IMF로 인한 실직, 금융자본주의는 가진 것이라고는 ‘맨몸’뿐인 4세대에 걸친 금순 할머니 가족을 통과하며 가난의 대물림 구조를 공고히한다. 부지런히 일해도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힘든 구조를 강화한다. 지은이는 25년간 한 가족을 따라다니며 ‘빈곤 문화’란 없으며 빈곤이 있을 뿐이고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름을 달리해 계속되는 재개발과 철거, 또 그로 인해 밀려나는 도시 빈곤층의 대물림 현실은,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이 가난함을 이해하고 가난의 조건을 이해한다면 조금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가난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