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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독자들 1: 그람시의 마키아벨리 독해 이론은 당대의 역사적 상황을 반성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맥락에서’ 그렇게 상이한 방식으로 정치적 독해를 수행했냐는 것이다. 그람시는 공장평의회 운동의 패배와 파시즘의 집권이라는 역사적 위기, 동시에 맑스주의의 위기에서 마키아벨리를 읽었다. 1921년 파시스트 세력이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병력 50만 명과 무기를 비축하고 관료들의 지지를 획득한 상황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이 여전히 무솔리니와 파시스트의 영향력을 간과할 때, 그람시는 마키아벨리를 읽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격렬히 전개된 토리노 공장평의회 운동에 참여했던 그람시는 ‘이탈리아 노동자 운동은 왜 파시즘에 패배했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마키아벨리를 읽었다. 그람시가 보기에 패배는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혁명 세력의 정치력 부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람시는 정치를 ‘상부구조’에 불과한 것으로, 정치적 지도력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당대 맑스주의자들에 맞서 정치적 지도 등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위해 마키아벨리의 언어를 필요로 했다. 그람시가 보는 마키아벨리는 사유와 행동, 철학과 정치, 정치와 윤리의 통일성을 주창한 사람이었다. 그람시에게 필요했던 것은 정치적 지도력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직관적 예리함이 가리키는 실천적 귀결들이었다. 따라서 그람시는 마키아벨리 독해에서 ‘헤게모니’(정치의 헤게모니적 요소)를 이론화하기 위한 틀을 발견한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 군주라는 ‘자리’이며, 따라서 군주는 하나의 이론적 추상물이라고 해석한다. <옥중수고>에서 ‘현대의 군주’라는 모델을 제시할 때 그람시는 ‘군주’를 정치적 정당이라는 집단적 주체로 해석해, ‘군주 개인의 권력 독점’이라는 파시즘적인 해석에 대항한다. 그렇게 해석된 <군주론>이야말로 맑시스트들에게 강한 매력을 가진 텍스트였다. 이처럼 그람시에게 <군주론>은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 맞먹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 정치적 독자들 2: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독해 알튀세르는 또 다른 맑스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그람시의 해석을 비판하며 마키아벨리를 읽었다. 1970년대 초반 알튀세르는 프랑스 공산당 내에서 ‘인간주의적’ 경향이 지배할 때 그에 맞서다 당내에서 고립되고 실패를 겪었다. 그런 가운데 이론적 자기반성을 수행한다. 초기 저작들에서 제기한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론으로서 철학’이라는 관념을 스스로 비판하고, 철학에 대한 계급투쟁의 우위를 주장한다. 이처럼 실천에 대한 관심 속에서 알튀세르는 그람시와 마키아벨리를 탐구했다. 분명 ‘마키아벨리와 계급투쟁’이라는 주제는 그람시를 경유해 사고해야 할 대상이었다. 알튀세르는 자신이 초기에 제시했던 ‘이론적 실천’ 개념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정의한다. 저술가이면서 동시에 정치가였던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실천’을 수행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론과 정치의 공백을 메우는 ‘이론적 실천’을 보여준다. 알튀세르는 그런 마키아벨리를 기존의 문제틀에 대한 단절로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을 수행한 사상가로 해석한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키아벨리의 글쓰기는 ‘정치적 행위’ 그 자체였다.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군주론>이 군주의 정치적 실천에 관한 텍스트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정치적 행동”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정세에 대한 지식인의 실천적 개입을 뜻하며, 그 지점에서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를 ‘유기적 지식인’의 모델로 이해했던 그람시를 계승한다. 하지만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이 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유로코뮤니즘으로 노선을 전환할 때 알튀세르가 치열히 비판하며 ‘맑스주의의 위기’를 선언한 이후, 그는 그람시와 멀어진다. 알튀세르는 그람시가 경제주의를 비판하는 중에 ‘상부구조의 우위’로 기울어 이데올로기를 무시하고 이데올로기론을 전개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급기야 마키아벨리의 군주로부터 ‘공산당=현대의 군주’를 도출하는 그람시의 발상을 공상적이라고 평가한다. 알튀세르의 비판은 그람시의 마키아벨리 독해를 겨냥한다. 헤게모니의 기능을 천착했던 그람시는 ‘동의’에 집중하고 정작 정치적 ‘강제력(힘)’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람시와 달리 마키아벨리는 ‘동의’뿐 아니라 ‘강제력’을 설명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론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이제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에 이르는 길을 처음 개척한 인물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비밀’을 누설하는 이론가로 해석한다. 결국 마키아벨리의 두 독자는 서로 다른 역사적 ‘위기’ 상황에서 그 위기의 이론적 공백을 메우려고 마키아벨리를 독해했던 것이다. ◎ 정치적 독자들 3: 슈미트의 홉스 독해 1933년 5월 슈미트는 나치에 가입한다. 그러나 1936년 나치 친위대의 기관지 <검은 군단>으로부터 가차 없는 비판을 받은 뒤 프로이센 추밀원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헌법 제정이라는 그의 과제에 대해 당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히틀러 본인도 새로운 질서의 ‘호국경’이 되려고 한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슈미트는 다시 홉스를 읽었다. 즉 그런 맥락에서 1938년에 나온 슈미트의 홉스 비판은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실패에 대한 진단으로, 자신의 정치적 전망과 기획이 실패했음을 토로하는 고백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슈미트의 홉스 독해는 그가 봉착한 난관을 보여준다. 발리바르 또한 정치적 위기에 처한 슈미트가 홉스와 자신을 동일시해 홉스를 “절망적으로” 읽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슈미트는 홉스를 넘어서려고 했다. 슈미트의 전략은 ‘리바이어던의 죽음’을 말하면서 그 죽음의 원인을 홉스 자신에게 돌리는 방식이었다. 리바이어던이 불멸의 신이 아니라 필멸의 신, 유한한 존재인 이상, 그것이 언젠가 내전이나 반란에 의해 파괴되리라는 점이 암시된다고 지적한다. 즉 슈미트는 홉스에게서 국가가 수립되면서 억제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내전’을 부활한다. 더 나아가 슈미트는 한때 자신이 결단주의적 주권 이론의 선구자로 매료됐던 홉스를 ‘자유주의자’로 극단화해 비판한다. 홉스가 기적 및 신앙에 대해 뿌리 깊은 개인주의적인 유보를 드러내는 대목에서 슈미트는 그런 내적 믿음에 대한 국가의 유예를 ‘리바이어던의 죽음’의 맹아로 보았다. 즉 개인의 ‘외적 행위’만 주권자에 의해 통제되고 ‘내면’에선 불간섭의 원칙이 통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가 내적인 믿음을 사적인 것으로 추방함에 따라 인민의 영혼은 내면성의 길을 걷게 됐다고 슈미트는 한탄한다. 그런 의미에서 슈미트는 홉스를 근대적 의미의 ‘개인적 자유’를 열어젖혀 사회를 상시적 내전의 혼란에 빠뜨린 인물로 독해한다. 이제 슈미트는 홉스의 국가론이 새로운 전체주의적 국가의 통일성과 총체성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정치적인 것을 ‘재신성화’하려 한다. 그리고 리바이어던보다 더 높은 권위, 즉 현존하는 법적 안정성에 중단을 초래할 예외상태의 결단주의로 나아간다. ◎ 정치적 상호 독자들: 슈미트와 벤야민 1973년 5월 슈미트는 한스외르크 피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1930년대 벤야민과 매우 빈번히 접촉하고 그의 사유와 지속적으로 대결했음을 암시했다. 1973년 4월 마찬가지로 피젤에게 쓴 편지에서 슈미트는 자신의 홉스 저작이 직접적으로 벤야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슈미트가 고백하고 있듯이 그의 홉스 비판은 궁극적으로 벤야민을 겨냥한 것이고, 홉스가 언급한 리바이어던의 안정성을 벤야민이 강조하는 ‘주권의 부재’라는 표상에 대립시키려 한 것이었다. 일찍이 1930년 12월 벤야민도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저작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그의 저작 <독재론>에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를 고백했다. 유태인 좌파 지식인인 벤야민이 보수적인 국가철학자이자 훗날 나치 당원이 되는 슈미트에게 보낸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