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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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몸이 문제인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가 문제인가? 장애해방을 향한 아홉 가지 여정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장애학 함께 읽기》 등의 책을 통해 ‘장애’를 ‘개인의 몸’에 존재하는 손상이 아닌 ‘사회적 산물’로 볼 것을 강조한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겸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김도현이 10년 만에 새로운 저서로 돌아왔다. 김도현은 여러 저작과 번역서를 통해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면면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한편, 장애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열어주는 해외의 여러 이론들도 활발히 소개해왔다. 이번에 펴낸 새 책 《장애학의 도전》에서는 장애인을 비롯해 인간의 위계에서 가장 후미에 위치한 이들의 자리에서 사회를 바라보고자 했다. 그 ‘변방의 시좌’로 장애인과 소수자를 향한 편견 어린 사고를 낱낱이 파헤치는 동시에,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장애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뤘다. 여전히 지배적인 ‘우생학’ 논리와 시스템,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 억압과 배제, 장애인의 자립‧자기결정권‧노동 등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하고도 논쟁적인 화두를 엮어낸 것이다. ‘장애인 차별 철폐’ 외침이 계속되는 투쟁 현장과 연구 그 무엇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몰두해온 저자의 세심한 통찰을 따라가보자. ‘장애’ 만드는 사회를 파헤치다 우리는 흔히 장애인을 몸에 일정한 손상을 입어 어떤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즉 ‘몸에 존재하는 손상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장애인을 인식하는 지배적인 방식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합당해 보이는 이 설명은 세계보건기구 WHO가 명시한 장애 정의(국제 손상・장애・핸디캡 분류, ICIDH)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장애학은 바로 이 매끄러운 논리에 틈을 낸다. 그 ‘할 수 없음’의 원인이 진정 개인의 몸에 존재하는 신체적, 정신적 손상이냐고 되묻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일반 시내버스에 승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WHO의 ICIDH 기준에 따르면, 이들이 해당 버스에 탈 수 없는 이유는 몸에 손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정으로 국내에 저상버스가 배치됐고, 똑같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은 이제 저상버스에 탑승할 수 있게 됐다. 이렇듯 동일한 손상을 지닌 사람이, ‘버스 타기’라는 동일한 행위를 어떤 경우(일반 시내버스)에는 할 수 있고, 어떤 경우(저상버스)에는 할 수 없다고 할 때, 과연 ‘버스를 탈 수 없음’의 원인이 개인의 몸에 존재하는 손상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는 동일한 손상을 지닌 사람으로 하여금 버스를 타거나 탈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정 개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손상’이 손상 그 자체를 넘어 ‘~할 수 없음’이라는 장애로 번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때 장애학은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특정한 관계에 초점을 둔다. 그 관계란 바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관계이며, 이는 흑인이나 여성 같은 또 다른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애인이라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장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 설정 역시 완전히 달라진다. 장애의 근본 원인을 ‘손상’으로 규정한다면, 그 해결책은 몸에 있는 손상을 ‘뜯어고치는’ 것뿐이다. 그러나 사회적 차별과 억압이 ‘손상’을 궁극적으로 ‘장애’로 만든다는 통찰을 공유한다면, 바로 그 차별과 억압의 구조를 바꾸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는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캐치프레이즈를 이제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마음에 새겨야 할 때다. 우생학이 지배한 인류의 20세기 인류 역사상 몸에 존재하는 특정한 이상이나 손상은 언제나 ‘열등함’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손상’을 ‘장애’로 만들어온 역사는 그만큼 유구하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마저 ‘정신적으로 불치의 결함이 있는 사람들’을 손수 죽일 수 있도록 사법제도와 의료제도를 입법화해야 한다고 언급했으니 말이다(《국가》 3권). 무엇보다도, 인종의 질을 개선해 더 나은 인간을 창조하려는 서구 사회의 오랜 욕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우생학을 지탱하는 것은 곧 우등한 인간 종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위선택이 필요하다는 믿음이다. 지난 20세기는 그야말로 ‘우생학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 ‘생존 경쟁에 따른 자연선택’론을 정식화한 이후, 인간 사회를 진화론적 관점에 의거해 설명하려는 ‘사회적 다윈주의’가 영국에 확산되기 시작한다. 물론 ‘경쟁’과 ‘도태’의 논리 자체가 다윈이 살던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정신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좀 더 공정할 것이다. 미국은 우생학을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시킨 나라로, ‘철강왕’ 카네기의 카네기연구소, ‘석유왕’ 록펠러의 록펠러재단, ‘씨리얼왕’ 존 켈로그의 인종개량재단 등 대자본가들이 우생학의 재정적 후견인을 자처했다. 우생학의 선풍적인 인기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강제로 혹은 자신도 모르는 새 단종수술을 당하게 된다. 1907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세계 최초로 단종법이 통과되고, 단종수술이 하나의 국가정책으로 확립된 이후, 단종법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나치 독일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단종수술을 시행하고, 안락사라는 미명하에 장애인을 집단 학살하기까지 했다. 최상의 복지정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북유럽 국가(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도 우생학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무엇보다도 스웨덴은 전 세계 최초로 (민간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 ‘국가인종생물학연구소’라는 우생학 연구 기관을 설립한 나라로, 다른 이웃 국가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단종법을 시행했다. 우생학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이제 그런 끔찍한 우생학적 폭력은 사라진 걸까? 놀랍게도 우리는 여전히 우생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시대 변화에 부응해 ‘인류유전학’과 ‘의료유전학’이라는 간판을 내건 새로운 우생학적 시스템은 훨씬 더 교묘하게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꼭 단종수술이나 안락사 같은 방식이 아니더라도, 장애인의 탄생 자체를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이상적인 기술들을 발전시킨 것이다. 산모 혈청 검사, 초음파 검사, 양수 검사 등 산부인과에서 흔히 실시되는 산전 검사가 대표적이다. 이런 검사들을 통해 태아의 장애 유무를 미리 확인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장애를 가진 태아에 한해 선별적 낙태가 허용된다. 산전 검사는 표면적으로 예비 부모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로서 정당화되며, 꽤나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산전 검사는 사실상 ‘행선지가 정해진 기차표’나 다름없다. 임신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산모 혈청 검사 같은 선별 검사는 이미 양수 검사 같은 진단 검사를 전제하며, 진단 검사는 다시 필연적으로 선별적 낙태를 전제하게 된다. 미국과 영국의 통계에 따르면, 양수 검사를 통해 다운증후군을 지닌 태아를 임신한 것으로 진단된 여성들의 85퍼센트 이상이 ‘낙태’를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산전 검사 및 검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유전 상담이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치료할 수 없는 이상이라면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논리는, 장애를 단순한 비극이 아닌 삶의 엄연한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는 수많은 장애인들의 경험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또한 장애아의 낙태를 선택하도록 하는 사회적, 경제적 압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