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철학이란 우선 무엇보다도 새로운 문제들의 창안에
다름 아니다.“ ―알랭 바디우
“철학은 이미 처음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장소에 거하고 있다는 확실성을 가진 사람들의 담론이 아니었다.” ―슬라보예 지젝
동시대 철학의 비전에 관한 두 철학자의 공통된 대답이자
그들 철학의 토대를 보여주는 입문서
이 책에서 바디우와 지젝이 공히 제출하는 대답은 “철학은 현실에 개입해야 한다”이다.(사실 이는 그들이 그간 보여준 이력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답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그들은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해나간다.
먼저 바디우가 강의를 하고, 뒤이어 지젝이 강의를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섹션에서는 두 사람 간의 토론이 진행된다. 두 사람의 토론은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불꽃이 튀는 논쟁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에 반복해서 동의의 의사를 표하며 자신들이 “동지”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동시대 가장 적극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동시에 현실 참여도 왕성한 두 탁월한 철학자가 각자의 철학적 기반 위에서 서로에게 공감하며 “함께” 제시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다.
덧붙여 이 책은 두 사상가의 철학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적절한 입문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질문 자체가, 이 두 철학자가 철학함에 임하는 입장과 자세, 그리고 그 철학함의 토대가 되는 사유에 대한 설명을 끌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정치적 투쟁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재에 개입하며
그 방식은 결정과 거리를 밝히고, 예외/사건을 받아들이는 이질성에서 출발한다
책은 “사건을 사유하기”라는 제목을 단 바디우의 강의와 함께 시작된다.
먼저 버려야 할 잘못된 생각이 있는데, 철학자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생각이 왜 잘못된 것인가? 철학자는 자신의 문제를 구성하는 사람, 즉 문제의 창안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는 텔레비전에 밤마다 출연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 받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중요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는 사람인 것이다. 철학이란 우선 무엇보다도 새로운 문제들의 창안에 다름 아니다.
“새로운 문제들의 창안(invention of new problems)”. 이것이 바로 바디우가 생각하는 철학의 정의이다. 철학이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 역시 이러한 정의로부터 도출된다. 철학자는 새로운 문제를 창안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는 기호들이 발생할 때 상황에 개입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철학자가 현재 속에서 새로운 문제, 새로운 창안의 필요를 지시하는 기호들을 발견하게 될 때 개입한다는 점이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질문이 될 것이다. 철학자는 도대체 어떤 조건들에 근거해서 새로운 문제를 위한, 다시 말해 새로운 사유를 위한 기호들을 상황에서 발견하게 되는가? 여기서 ‘철학적 상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세계 속에서는 온갖 종류의 일들이 발생하지만, 이들 모두가 철학을 위한 상황들, 즉 철학적 상황들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철학을 위한 상황, 그러니까 철학적 사유를 위한 상황”을 바디우는 세 개의 예를 들어 제시한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에서 보이는 소크라테스와 칼리클레스의 대립,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일본 영화감독 미조구치 겐지의 작품에 나오는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 철학적 상황은 ①선택, 즉 결정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기, ②권력과 진리들 사이의 거리를 규명하기, ③예외가 갖는 가치, 사건이 갖는 가치, 단절이 갖는 가치를 밝히기로 정의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철학의 임무가 된다.(분과학문이 아닌 철학)
이 세 가지 상황의 공통점은 그것이 “통약 불가능한” 두 항목 간의 “역설적”인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와 칼리클레스 예에서 우리는 화해와 합의에 결코 이를 수 없고 결국 양단 간에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은 국가의 권리와 창조적 사유 사이에 어떤 공통된 척도도, 진정한 토론도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리고 일본 영화의 사랑 이야기 역시 사랑이라는 사건(실존의 뒤집어짐)과 삶의 일상적인 규칙들(도시의 법, 결혼의 법) 사이에는 어떤 공통된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관계”는 “관계 아닌 관계”이며, 단절이다.
이 단절이 생기는 곳, 그곳이 철학의 자리이다.
나는, ‘어떤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철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철학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것에 대한 사유가 결코 아니다. 역설적인 관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단절들이나 결정들, 거리들,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철학이 존재하는 것이고 또 철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정치와 구분되는 철학의 단독성이 드러난다. 철학은 정치적 투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개입한다.
나는 철학적 참여가 갖는 단독성(singularity)을 강조하고 싶다. 철학과 정치는 절대적으로 구분되어야 하는데, 철학에 의해 설명되는 또는 심지어 철학에 의해 필연적인 것이 되는 정치적 참여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철학과 정치는 서로 별개의 것이다. 정치는 집단적 상황들의 변형을 목표로 하는 반면, 철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제들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이렇게 제시되는 새로운 철학적 문제들은 직접적인 정치적 투쟁성과 관련된 경우와는 전혀 다른 방식, 전적으로 다른 판단 형식을 구성하게 된다.
나는 진정한 철학적 참여는 여러 상황들 속에서 이질성(foreignness)을 창조한다는 바로 이 지적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철학적 참여는 이질적인 것이다. 이질성을 소유하지 못한 채 그저 진부한 것이 될 때, 이와 같은 역설에 몰두하지 않을 때 철학적 참여는 꼭 철학적일 필요가 없는 정치적 참여, 이데올로기적 참여, 시민의 참여가 된다는 의미이다. 철학적 참여는 그것의 내적 이질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을 결정하고, 거리를 밝히며, 예외와 사건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철학적 참여는 이질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결국 보편적 원칙들이라는 이름 아래 역설적 상황에 참여하기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보편성에 대한 여덟 가지 명제들이 바디우 강의의 뒷부분에서 제시되면서 그의 주장을 보완한다.
철학은 논쟁의 개념을 바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정상성이며
그 전치와 이질성의 자리가 곧 철학의 시작점이다
지젝의 강의 제목은 “철학은 대화가 아니다”이다. 바디우의 강의가 자신의 논지를 위해 직진하여 돌파하는 방식이라면, 지젝의 강의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점프하며 지도 전체를 드러내 보인다. 두 사람의 스타일상의 대조는 오히려 독자가 그들이 공통으로 제시하는 답에 접근하기 쉽도록 도움을 준다. 지젝의 말은 무차별적이고 도발적으로 뻗어나가지만 그렇게 해서 일거에 목표에 도달한다.
지젝 역시 바디우와 마찬가지로, 철학 안에 정치를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는 철학의 기능은 선택이 잘못된 대안을 제시할 때 논쟁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다.(들뢰즈 식으로 말해 “이접적 종합”)
그러한 잘못된 대안, “철학의 잘못된 예”가 제시되는데,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랑크푸르트학파, 쾌락주의, 뉴에이지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을 둘러싼 논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인공적 현실에서 다른 인공적 현실로 이동할 수 있는 경이적인 노마드적 주체성을 주장하지만, 진정한 철학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