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_「내 정원의 붉은 열매」 중에서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권여선 신작 소설집!
2008년 단편소설 「사랑을 믿다」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권여선이 삼 년 만에 세번째 소설집을 선보인다. 수상작을 비롯하여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소설집은, 날카로운 시선과 감각적인 수사학으로 가하는 거침없는 자기해부가 묘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지나간 자리와 상처를 냉연하게 들여다보는 그 조용한 격정이 서늘할 정도로 아름답다.
언어로 호출되는 내면의 파노라마, 그 예리한 시선!
문자만으로 내면의 서사, 내면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권여선 소설의 화자는 이렇다 할 커다란 사건이 없이도 독자를 휘몰아간다. 인물의 날카로운 성찰이 두드러지는 대목에서 독자는 선명하고 감각적인 인상을 얻게 되는데, 이러한 대목을 읽다보면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그 쾌감은 뿌옇기만 했던 그림을 낱낱이 언어로 잡아챘을 때 느낄 수 있는 통쾌함과도 닿아 있다.
야심이나 권력욕이 그다지 추하지 않게, 오히려 고급스런 액세서리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는 사람이 있다. 연선배는 사람을 긴장감 있게 끌어당기지만 아무리 가까워져도 끝내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을, 끝이 보이지 않는 서늘한 동굴 안을 들여다보듯 좋아했다. 세상에는 손바닥만한 웅덩이처럼 뻔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_「빈 찻잔 놓기」 중에서
이러한 대목은 자칫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진술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 이미지는 때때로 문자로 화한 아름다움을 불러들인다.
권여선 소설이 보여주는 내면의 디테일은 인물이 먹는 음식에도 살아 있다. 후미진 술집에서 옛 애인을 만난 ‘그녀’는 ‘나’에게 묻지도 않고 제육볶음과 해물볶음을 반반씩 섞은 안주를 주문한다.(「사랑을 믿다」) 각각 이만원짜리 안주 두 가지를 반반씩, 오천원만 추가하는 선에서 주문하는 것을 본 ‘나’는 ‘그녀’의 지나온 시간을, 그 시간 속에서 변화한 내면을 짐작하고 자평한다. 또한, 퇴직한 뒤 매일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그’가 아침마다 주문해 먹는 음식은 “맛에 가장 변화가 적은 죽”이다.(「당신은 손에 잡힐 듯」) “불규칙한 증감곡선을 싫어”하는 ‘그’는 내용 없이 오직 형식만이 기계적으로 유지되는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빛나는 통찰이 살아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갈피를 접고 숨을 고르게 만든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_「사랑을 믿다」 중에서
자신의 아픈 자리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지나간 이야기를 한데 그러모으는 이 “시린 진리”는 작가가 우리 앞에 내려놓은 ‘빈 찻잔’과도 다름없다. 그 안에 누군가를, 어떤 시간을 채워넣을지는 이 책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남겨진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