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문훈의 크리에이티브 비밀 노트
2014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25점 수록
시베리아 샤먼 요정의 펜과 함께 달로 가는 초대장
“도가적 상상력과, 도시적 구조로 색다른 펑크아트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시베리아 샤먼인 문훈”(함성호)의 이 그림노트를 펼치면 “트랜스포머의 몸뚱이를 가진 요정이 튀어나온다.”(정혜윤) 그리고 그 이상하고 매력적인 시베리아 샤면 요정의 펜을 따라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우리는 서서히 변화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정관념이나 자기검열,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살면서 잃어버렸던 세상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되살아나고, 갑갑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껏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기운이 샘솟는다. 펜으로 요술을 부리는 유쾌한 요정의 초대장을 받아든 순간, 우리는 그의 상상과 더불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삶의 모든 순간순간이 기쁨의 연속이라고 느끼게 된다. 놀랍고도 신기한 마법 여행이 시작된다. 요정은 이야기한다. 진짜 흥미진진한 상상은 현실을 바꾸려 억지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유자재로 변신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축척을 다루는 건축가는 우주의 크기를 헤아리다 문고리에 붙어 있는 세균의 크기를 생각한다. 내가 작아지면 된다. 세균만큼. 그러면 오리 뼈 속에서 음악당을 발견할는지도.” (10쪽, [도가도비상도 오리단면도] 중에서)
내용 요약
통념을 뛰어넘는 파격의 디자인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건축계의 괴짜, 크레이지 아키텍트 문훈. 달팽이 모양 주택, 뿔과 꼬리를 단 펜션, 그물스타킹을 뒤집어쓴 빌딩, 로봇이나 우주선을 닮은 건물까지,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대부분 평범함이나 정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낯설고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익숙한 의미로 대치하려 한다. 그러나 문훈은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가는 미꾸라지처럼, 언제나 세상 사람들의 잣대나 정의 사이로 비껴나간다. 결국 그는 어떤 말로도 규정하는 것이 적절치 않은, 넘치는 상상력의 소유자다.
네 살 꼬마 때부터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그는 거의 매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그림으로 그려왔다. 그리고 이제는 생각이나 말의 속도보다 펜을 움직여 그림으로 그려 보이는 손의 손도가 더 자유로운 건축가가 되었다. 그림은 그가 꾸는 꿈과 무한대의 상상을 현실에 붙잡아두는 미약한 수단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크리에이티브의 핵심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달로 가는 제멋대로 펜』은 그가 지금까지 그린 수만 장의 그림들 가운데 120점을 추려내 새롭게 글을 붙인 책이다. 그림 중엔 실제 건물의 설계도면도 있고, 설계 과정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발전한 상상의 건물도 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 위에 작가의 상상을 겹쳐 그린 신기루 같은 그림도 있고, 사막과 초원, 도시와 섬을 여행하며 그린 유쾌한 여행지도도 있다.
그림들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고, 여러 의미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글은 그림 속에 숨은 또다른 그림들을 찾아가는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하지만 그 모두가 작가의 기억과 상상, 현실과 환영이 뒤섞인 꿈속 이야기, 관람자의 상상력에 따라 끊임없이 변신하는 유연한 그림, 문훈 버전 몽유도원도다.
키워드로 보는 ‘달펜’
1) 두들링(doodling, 끼적거리기)_책의 형태에 얽힌 사연: 평범한 듯 보이는 이 책의 표지를 펼치자마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묻게 될 것이다. 어, 이 책은 모양이 왜 이래? 두 권의 책이 하나의 표지 아래 마주보고 붙어 있다. 한쪽엔 그림만 있고 다른 쪽엔 글만 있다. 책들은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폼 잡는 디자인인가? 불편하게 왜 이렇게 만들었지? 그냥 남들과 다르게 튀고 싶어서?
이것은 문훈의 건축물을 처음 접한 사람들의 반응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형태가 이토록 낯설고 흥미로워진 것은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의도나 추구라기보단,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필연에 더 가깝다. 저자는 어린아이 때부터 거의 매일 그림일기를 그려왔다. 그날 먹은 밥과 반찬, 만난 사람들, 가본 장소, 꿈꾼 내용, 일을 하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들, 혼자 빠져든 몽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기에는 모든 것이 담긴다.
“하루 종일 내가 한 일을 조각조각 나누어 연결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중요하건 중요하지 않건 낱낱이 열거하는 것. 그림일기 안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경험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이 세상에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은 없으며, 사소한 일들 또한 기록할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가 연결되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숨은그림찾기와 같다.”(65쪽, [숨은그림찾기] 중에서)
그렇게 그려댄 그림들이 40년이란 시간과 더불어 어느덧 수만 장에 달했다. 그리고 이제는 펜과 종이만 있으면 손이 저절로 움직여 뭔가를 끼적거리고 잠시 후엔 그림 한 장이 뚝딱 완성된다. 어떤 그림은 작은 노트 한 페이지를 채우는 데 꼬박 8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30초 만에 완성되기도 한다. 어떤 한 가지를 오래 단련하여 마스터가 된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림은 그에게 호흡과 같이 보인다. 『달로 가는 제멋대로 펜』은 그중에서도 저자의 개성과 지향성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는 그림들로 120점을 골라 담는 기획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그림을 골라내고 보니, 그림들은 저마다 크건 작건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어떠한 여백도 허락하지 않은 채 스스로 완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각각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새로이 덧붙여 쓰더라도 그것을 한 페이지 안에서 보여주려 하면 글은 그림을, 그림은 글을 서로 밀쳐냈다. 화가의 도록이나 건축가의 드로잉집이 아닌 ‘그림에세이’인 만큼, 글과 그림이 화목하게 어울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먼저 그려진 그림들은 오롯이 하나의 책으로 묶이고, 나중에 쓰인 글 또한 새로운 책으로 묶인 후 서로 마주보게 하는 디자인이 선택되었다. 모두가 저자에게서 온 것들이지만, 글과 그림은 조금 떨어져 있음으로써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돋보이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작가가 이상하니 책도 요상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2) 두들 마이 웨이 투 더 문_제목에 얽힌 사연: 저자는 자신이 즐겨 쓰는 몰스킨 노트를 구입하면 맨 첫 장에 그해의 날짜를 적고 부적같이 생긴 빨간 도장을 찍은 후, 제목을 붙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그 제목은 항상 ‘Doodle My Way To The Moon’이다. 그러니 이 책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제목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한데 저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영문 타이틀을 한글로 풀어내려 하다 보니 저 다의적이고 깊고 외로운 제목을 한국어로 그대로 옮겨오긴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저런 다른 제목들이 제안되었지만 결국 ‘달로 가는 제멋대로 펜’이란 엉뚱한 제목이 튀어나왔다. 영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낯설지만 흥미로운 제목으로 읽히길 기대하면서.
3) 2014 베니스 비엔날레_2개 국어로 표기된 사연: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2014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초대작가로 선정되었다. 이전에도 저자의 드로잉은 세계의 다양한 건축 잡지에 여러 차례 수록되었으며, 각종 전시에도 자주 초청되었다. 그의 그림이 가진 기묘함과 유쾌함, 편집증적 치밀함과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은 건축의 관점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호기심과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쾌활하고 자유롭고 촘촘한 선들로 이루어진 드로잉은 관람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영원히 지치지 않을 것만 같은 에너지로 넘치는 이 그림들은 바로 문훈의 독창적이고 개성 넘치는 건축디자인의 원형(原形) 같은 것이고, 그래서 베니스 비엔날레 또한 건축가임에도 그의 드로잉을 전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책은 이러한 사정에 맞추어 국문 원고에 영문 원고를 덧붙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