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 책 『영광전당포 살인사건』은……
1999년 첫 장편소설 『괴력들』을 발표한 이후 2011년 『사랑, 그 녀석』까지, 쉼 없이 장·단편소설 작품들을 내놓으며 왕성한 필력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가, 한차현. 2003년 1월 처음 출간된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 『영광전당포 살인사건』을 8년여 만에 새로이 펴냈다. 복간을 기해 고심해서 문장을 다듬고 가필 수정한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며 스스로 ‘내 문학의 원형’이라 밝혔다. 그만큼 『영광전당포 살인사건』은 한차현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두 번의 살인 사건, 그리고…
낡고 음산한 아파트 906호에 살고 있는 주인공 차연은 장기실업상태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우연히 이웃 908호의 치매노인을 매주 한 번씩 돌보는 파출부 원형을 알게 되고 밤늦게 일이 끝난 뒤 차가 끊기는 그녀를 하루씩 재워주면서 특별한 관계가 된다. 그러던 중 908호 노인이 끔찍한 몰골로 살해당하고 원형은 사라진다. 908호 노인을 죽인 것은 904호에 살고 있는 김시민으로 밝혀진다. 그는 평소 부패근절과 구세력의 청산을 부르짖던 대학생. 그런데 알고 보니 김시민은 수명이 고작 7년밖에 안 되는 레플리컨트(생물학적 소재로 만든 사이보그)로 원형이 속한 조직의 사주를 받았다. 차연 앞에 다시 나타난 원형은 908호 노인이 늙은 고문기술자 전형근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김시민이 죽인 908호 노인은 전형근이 아니라 전형근의 복제인간인 주응달이었다. 진짜 전형근은 서울 외곽에서 영광전당포를 운영하며 서민들을 착취하고 있다. 원형은 차연에게 진짜 전형근의 살해를 요구하고 대의명분에 굴복한 차연은 그를 찾아가 등산용 손도끼로 그의 머리를 박살낸다. 그러나 진짜 살인 사건은 상부의 권력과 원형의 조직이 공멸을 피하는 조건에서 타협하는 것으로 해결된다. 김시민이 살았던 아파트에 그의 분신처럼 보이는 ‘이후영’[‘뒷그림자(後影)’]이 이사 오며, 소설은 또 한 번의 살인 사건을 예고하며 끝난다.
한바탕 악몽을 꾸고 난 느낌, 무엇이 현실이고 상상인가
독거노인의 죽음과 그 집에 파출부로 드나들던 여인, 그리고 무위도식하는 나. 추리소설인가 싶다가 치정극인가 싶다가 조금 더 읽다 보면 고문기술자가 등장하고 복제인간이 등장한다. 결코 함께하기 쉽지 않았을 이 이질적인 요소들은 재기발랄한 작가의 솜씨 덕에 무난히 조합된다. 발표 당시 “판타지·엽기·추리와 사회비판이라는 이질적 요소가 융합된 만화경”이란 평을 받은 이 소설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의 모험을 소설의 모험으로 대신하려는 욕망 속에서 태어났다. 상상의 모험이 실제의 현실로 실현되기를 꿈꾸는 것은 이 소설이 지닌 아이러니컬한 운명이다. 한차현은 ‘실제 현실’의 반영과 ‘상상된 현실’을 혼합하여 세계의 실체를 규명하려 하며, 더 나은 상태로의 변혁을 열망한다. 이 이중의 수고와 변혁의 어려움으로 인해 이 소설은 냉철한 분석력으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약간의 관념성과 감상적인 우수에 젖어 있다.
폭력과 권력의 본질, 그리고 존재와 기억에 대한 의심
이 소설에는 시대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뒤섞인다. 1980년대 소설의 핵심코드였던 독재정권의 억압과 각성된 주체들의 저항이라는 설정에다 90년대의 코드인 일상과 일탈, 성적욕망, 내면화된 권력, 원본과 복제물의 구별이 사라진 시뮬라시옹과 사이버세계, 그리고 21세기의 화두인 인간복제까지 등장한다. 사이보그, 레플리컨트, 복제인간, 보복살인 등의 설정이 난무하는 이 소설은 추리와 판타지소설을 표방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적 재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재치 어린 장치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폭력과 권력의 본질, 정치·사회적인 사안, 억압된 주체들의 저항, 그리고 존재와 기억에 대한 의심이 의미심장하게 숨겨져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보는 듯한 섬뜩함과 상실감(내지는 허탈감), 『죄와 벌』의 주인공이 된 양, 까닭 없는 죄책감을 느끼는 사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 옆자리의 이 사람은 누구인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