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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오래됐고, 오래 버텨 왔고, 오래 살아갈 존재들|한채윤 1부 전환, 시작하다 ― 고대부터 1940년대까지 우리의 시작은 ‘전환’이었다|화랑은 게이일까|왕의 사랑을 받는 남자, 용양신|혜공왕을 의심하지 마라|용양지총과 왕의 남자|왕이 사랑하고 주위 사람들은 존경한 원충|결코 알 수 없는 공민왕의 진심|박씨 소년을 사랑한 고승|〈한림별곡〉 제8장에 담긴 비밀|세자빈 봉씨는 누구를 사랑했을까|옷소매 붉은 끝동에 숨겨진 사랑|세종대왕의 사촌은 왜 그랬을까|실록에 남겨진 인터섹스, 사방지|부인을 레즈비언으로 몬 대군|여자에게 장가가고 남자에게 시집간 임성구지|죽음마저 뛰어넘은 여성들 사이의 우애|이것이 조선의 퀴어 페미니즘이다|예나 지금이나 남장 여자는 인기 있다|조선 통신사가 일본에서 본 남색|천하에 없는 것이 없다|박지원도 피하지 못한 검열|정약용이 조선에 없다고 말한 것|조선 시대 백과사전에 기록된 인터섹스|온 천하에 널리 퍼진 남총과 대식|조선의 퀴어 페미니스트 영혜빙|이웃집 소년을 사랑한 선비|외국인이 기록한 조선의 남색|음담패설이 남성 간 성행위를 다루는 법|인터섹스 상상력을 담은 조선 시대 소설|김구, 동성애를 이용해 탈옥하다|《매천야록》에 남총이 남은 이유|이광수, 일제 강점기에 ‘비엘’을 쓰다|100년 전에도 실행된 성전환 수술|양복 입고 머리카락 잘라 저항하다|1920년대 ‘동성연애주의 실행자’가 등장하다|신여성, ‘동성연애’를 유행어로 만들다|조선에 수입된 ‘봄철의 센세이ㅤㅅㅠㄴ’|이성애에 지지 않는 사랑을 나눈 두 처녀|여성 간 결혼식 100년사|성욕 발달 단계로 동성애를 설명하다|수동무가 있던 어느 시절 2부 여성국극과 파고다극장 ―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1950년대, 인터섹스에 관한 지식이 생산되다|성전환 수술도 몰랐다며 안타까워하다|여성국극, 또는 퀴어한 존재의 문화사|‘서 있는 사람들’의 연대기|경찰에 붙잡힌 ‘일하는 여성’들|여장 남자와 병역법 위반|전설 속 ‘P 극장’|쌍둥이 처녀, 남자로 돌변하다|신문 연재소설에 담긴 퀴어|영화 속 넘쳐 나는 퀴어한 인물들|남장하고 잘 살아 보세|동성애 스캔들을 일으키고 은퇴한 인기 가수|외국 동성애 운동을 발 빠르게 소개하다|입양 간 트랜스젠더가 돌아오다|운전하는 레즈비언들의 모임, 여운회|‘남장 처녀’ 김옥선, 국회의원 되다|트랜스젠더 업소의 역사는 유구하다|‘치마씨’와 ‘바지씨’|명동,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요람|장발 단속 안 걸리는 레즈비언들|검열을 뚫고 동성애를 다루다|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 남긴 사랑|여장, 혐오감이나 일본풍에 연결되다|한국인은 에이즈에 안 걸린다고?|드라마와 영화로 부활한 사방지|영화에서 더 강화된 동성애 규제|검열 바깥의 미디어 ‘AFKN’|1980년대에 레즈비언을 다룬 드라마 3부 모습을 드러내는 ‘최초’들 ― 1990년대 성별 정정을 둘러싼 뜨거운 소란|뉴욕에 한인 동성애자 모임이 만들어지다|한국 사는 외국인 레즈비언들 뭉치다|트랜스젠더를 게이라고 부른 시절|《겨울 허수아비도 사는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다》|초록은 동색, 초동회 뜨다|게이 인권 단체 친구사이 탄생하다|한탄강에서 싹튼 레즈비언 인권 운동|《이젠 더 이상 슬프지도 부끄럽지도 않다》|“게이, 레즈비언 학생들은 연락 바랍니다”|“한국에도 정말 동성애자가 있습니까?”|그 유명한 연세대 성정치 문화제|미디어, 에이즈 공포를 조장하다|파란 화면 속 퀴어들|피시통신과 성소수자 인권의 상관 관계|단체들이 잡지를 내다|〈개 같은 날의 오후〉 다시 보기|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는 대전에 있었다|시대를 유영하는 ‘은어’들|‘보갈’이란 무엇인가|레즈비언을 위한 섬 ‘레스보스’|레즈비언의 심장을 뛰게 한 〈송지나의 취재파일〉|한국통신이 기뻐한 전설의 전화 사서함|일반이 아니니까 ‘이반’이다|주요 도시마다 동성애자 모임이 만들어지다|이태원, 게이의 새로운 메카로 뜨다|왜곡 보도 언론에 사과를 받아내하다|퀴어, 책을 만나다|한국 사회에 균열을 낸 퀴어 영화들|트랜스젠더, 강간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다|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서 인권 단체가 처음 생기다|동성애자 기독교인 모임 ‘로뎀나무그늘’|공중파 시사 방송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다|노동자 집회에 무지개 뜨다|퀴어 의료인 모임 ‘동의모’ 탄생하다|전설이 된 한국 최초 게이 웹사이트|퀴어판 최초 촛불 집회 열리다|형이라 불리는 여자|레즈비언 독립 잡지 《니아까》|칸 영화제 수상작도 뚫지 못한 수입 불허|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의 만남|전기를 끊어 퀴어 영화제를 막다|‘지나친 동성애’라는 기막힌 심의 기준|대선 후보에게 처음 보낸 질의서|주인공이 죽어야만 끝이 났다|대동인에서 동인련으로|1998년 1월을 달군 ‘에이즈 투쟁’|9시 뉴스에 나간 잡지 《버디》|최초 동성애자 극단이 공연하다|‘물오리’와 ‘레스보스’, 출판으로 운동하다|전무후무한 게이바 불매 운동 성공 스토리|한동협, 그리고 저무는 피시통신 시대|핑크 머니를 시도하다|게이가 만든 레즈비언 사이트 티지넷|청소년보호법이 청소년 동성애자에게 끼친 영향|야오이와 비엘, 만화가 안겨 준 해방|어디로 갈지 모를 때 찾아가는 ‘오데로’|국가인권위원회법에 ‘성적 지향’ 들어가다|처음 생긴 동성애 전문 출판사, 아직도 있다|청소년 동성애자 커뮤니티 만들어지다|게이 무가지 《보릿자루》와 이반의 삶|1990년대에 시작된 퀴어 소설 붐|‘화랑’으로 시작해 ‘이반시티’로|대학 동성애자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