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이란 무엇인가

알랭 바디우 and 5 others
2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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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템포러리 총서 2권.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주디스 버틀러 등 현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이 ‘인민(people)’이라는 개념과 관련해 쓴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인민적(대중적)’이라는 말의 쓰임이 담고 있는 의미와 권력관계, 집회의 자유, 감각적으로 재현되는 인민의 이미지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포퓰리즘 등에 관한 논의에서 독자들은 이제까지 생각하지 않아왔거나 감춰졌던 ‘인민’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인민’을 통해 겨누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모호한 기표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상당히 모호한 정체인 것은 분명하다. 그 민주주의는 언제나 배제를 전제하는 민주주의이고, 권력분산의 원칙이 압도적인 힘 관계를 통해 무너져버린 민주주의이다. 부르디외의 글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민주주의라는 절대적인 기표에 균열을 내는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실행 주체가 사라진 명목상의 민주주의에서 인민이 제자리를 찾는 험난한 여정에 관한 고민이 담긴 이 책은 정치적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한편으로 많은 변이들을 낳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인민을 구해내는 데에도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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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인민’이라는 말의 쓰임에 대한 스물네 개의 노트 _ 알랭 바디우 ‘인민적’이라고 말했나요? _ 피에르 부르디외 우리, 인민 - 집회의 자유에 관한 생각들 _ 주디스 버틀러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 _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인민과 제3의 인민 _ 사드리 키아리 찾을 수 없는 포퓰리즘 _ 자크 랑시에르 해제: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 민주주의로부터 ‘인민’을 구하기_ 서용순

Description

민주주의와 그 바깥에 대한 여섯 개의 통찰 인민이 지워진 낡은 국가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재조합해야 할까 “국가란 우리가 창조하고자 열망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가이거나 우리가 사라지기를 열망하는 공인된 국가이다.” - 알랭 바디우, 본문 중에서 최근 10여 년 동안 한국에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체로 황당하거나 비극적이었던 사건들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인민의 뜻에 반하는 국가에서 인민이란 무엇이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선거철에만 호명되어 잠시 대접받는, 그러나 국가와 연관된 부조리에 대해 거리에 나서면 늘 묵살당하고 ‘불온세력’으로 매도되어야 하는 무기력한 인민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고민의 그 시작은 ‘인민’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낱낱이 드러낸 후 곱씹어 인민의 현재적 한계와 ‘또 다른 인민’의 가능성을 찾아 지워지고 잊힌 권리를 찾는 일일 테다. 이 책은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주디스 버틀러 등 현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이 ‘인민(people)’이라는 개념과 관련해 쓴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인민적(대중적)’이라는 말의 쓰임이 담고 있는 의미와 권력관계, 집회의 자유, 감각적으로 재현되는 인민의 이미지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포퓰리즘 등에 관한 논의에서 독자들은 이제까지 생각하지 않아왔거나 감춰졌던 ‘인민’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왜 지금 ‘인민’을 고민해야 하는가? 오랜 세월 동안 ‘인민’이라는 말은 한국사회에서 금칙어였다. 가장 큰 이유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이른바 ‘빨갱이’ 취급을 받아야 했던 탓이다.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전적 뜻을 지닌 ‘인민’은 이렇게 역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혹은 특정한 정황에 조금 더 알맞은 대상을 호명하려는 의도로 민중, 대중, 다중 등으로 달리 불려왔지만 주권을 구성하는 존재를 일컫는 가장 적확한 단어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인민’을 고민해야 할까? 그것은 19세기 이래로 좌파에게든 우파에게든 정치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근거가 인민이라는 단일한 개념에 있었지만 이제 그 개념이 다시 사유되고 규정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인민 주권’, 모든 사람의 권력을 전제하는 보편적 인민의 개념은 이제 협소하고 무기력한 인민 개념,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로서의 인민으로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한정된 인민, 국민을 지칭하는 형용사를 통해 한정된 인민, 국가가 인정하는 해롭지 않은 인민, 선거에 참여하고 자본의 생산물을 ‘자유롭게’ 소비하는 무기력한 인민으로 제한되었다. 과거에 철학적으로 가정되었던 단일한 의지로서의 인민이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국가가 규정하는 인민(‘선거용 인민’)의 바깥에서 자신의 권력을 요구하고 선언하는 ‘다른 인민’의 존재를 목격한다. 그것은 국가적 제한에서 배제된 ‘비실존의 인민’, 거리와 광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권력 집단과 거대 자본에 대항하는 싸움 속에서 형성되는 ‘모호한 인민’이다. 이 책은 그러한 바깥, 국가의 바깥, 제도의 바깥, 권력의 바깥에서 포착되는 인민에 대한 성찰로 채워져 있다. 대표적 사상가 여섯 명이 ‘인민’이라는 말에 관해 펼치는 철학적 논의들 단일하고 통일적인 인민을 사유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이 책의 저자들은 어떤 잠재적 인민,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적 다수의 구성으로서의 인민, 인민에서 배제된 인민 바깥의 인민, 인민의 내재적 예외로서의 인민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들은 인민의 현재적 한계와 ‘또 다른 인민’의 가능성을 살핀다. 정치의 구성적 부분이자 단일한 전체로 간주되었던 ‘인민’은 정체되고 무기력한 인민, 제한적인 인민으로 규정되고, 그렇게 제한적으로 파악되는 인민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배제된 존재들’의 한가운데서 새로운 인민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국민을 지칭하는 형용사에 의해 한정된 인민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프랑스 인민, 영국 인민과 같이 정체성에 의해 봉인된 인민은 단지 반동적인 정복자들에게만 어울리는 것이거나 국가에 의해 정체성이 부여된 무기력한 전체를 의미할 뿐이다. 바디우는 스물네 개의 노트를 통해 정치적으로 새로운 인민의 실존에 관해 이야기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민적(대중적, populaire)’이라는 형용사가 만들어내는 관용구들이 적법한 언어에서 배제된 것의 집합을 형성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언어의 질서 안에 어떤 분할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점을 드러내려 한다. 그는 그러한 분할의 논리가 통속적 언어와 거리를 두는 지배 집단과 지배적 언어에 반항하는 피지배 집단의 분리를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언어의 발화가 계급적이고 성적인 차원에서 각자의 논리로 분할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실질적인 인민 주권의 실행이 거리로 몰려나와 집회를 통해 ‘우리’를 만들어내는 ‘우리, 인민’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월스트리트나 타흐리르 광장, 푸에르토 델 솔 광장 등에서 거리의 정치에 나선 몸들이 누가 인민이며 인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토론하는 발화 행위에서 저항과 새로운 정치조직을 만드는 한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하나의 인민, 다시 말해 통일성과 전체성으로서의 ‘인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다시금 재현되는 ‘인민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는 인민을 감각할 수 있게 만들었고, ‘무권력의 선언’ 안에 있는 인민들을 보여주었던 여러 문학 작품들과 다큐멘터리, 사진들을 자유롭게 언급하면서, 그러한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야말로 사람들이 감동하기 시작하고, 사유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사드리 키아리는 ‘인민’ 개념이 인민의 적대적 외부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오늘날 인민을 사유하는 데에서 ‘인종’의 개념이 갖는 중요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프랑스(그리고 유럽 전체)는 보편주의적 인민이 사회적 인종들이 갖는 위계를 은폐하면서 작동한다. 백인, 유럽인, 기독교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인민은 인민에 속하면서 속하지 않는 ‘인민 밖의 인민’, ‘제3의 인민’이다. 키아리는 이른바 ‘좌파 정치’도 여전히 인종적 특권을 해체하지 못하고 국가적(국민적) 정체성의 포로로 남아 있음을 직설적인 어투로 비판한다. 자크 랑시에르의 글은 ‘포퓰리즘’을 겨누고 있다. 그에게 오늘날 미디어의 사냥감이 되고 있는 포퓰리즘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정치를 불신하고 거부하는 적대적 인민의 형상을 그려내기 위한 것이다. 지배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적 인민의 이념을 군중의 위험한 이미지와 결합시킴으로써 현재의 의회민주주의를 정당한 것으로 강변하는 일이다. 그 군중은 우리를 전체주의로 몰고 갈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무분별한 ‘인민’, 포퓰리즘의 인민은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힌다는 것이 랑시에르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반대해 민주주의를 구해내는 험난한 여정 이 책이 ‘인민’을 통해 겨누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모호한 기표(signifiant)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상당히 모호한 정체인 것은 분명하다. 그 민주주의는 언제나 배제를 전제하는 민주주의이고, 권력분산의 원칙이 압도적인 힘 관계를 통해 무너져버린 민주주의이다. 부르디외의 글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민주주의라는 절대적인 기표에 균열을 내는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실행 주체가 사라진 명목상의 민주주의에서 인민이 제자리를 찾는 험난한 여정에 관한 고민이 담긴 이 책은 정치적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한편으로 많은 변이들을 낳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인민을 구해내는 데에도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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