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나의 감정은 진정 내 것인가?
뉴스 앵커는 사건을 보도하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 사건을 감정적으로 포장해주는 것이다. 또한 놀이공원에 가서는 이미 철저하게 설계되어 있는 재미와 즐거움을 경험하고 행복함을 느낀다. 감정 역시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산업에 의해 조작되고, 기계적인 ‘탈감정’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뒤르켐과 전쟁범죄 연구자로 이미 미국에서는 이름 난 사회학자인 저자 스테판 메스트로비치는 현대사회의 탈감정적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보스니아 내전과 미국에서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O.J.심슨 사건을 분석한다. 보스니아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어갔지만 내전을 중단시킬 수 있는 어떠한 실제적인 행동도 없었다. 다만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희생자들에게 마치 그들이 허리케인에서 살아남은 것처럼 인도주의적 지원을 할 뿐이었다. O.J.심슨 재판에 대한 미국 대중의 관심은 살인사건으로 죽은 심슨 부인에 대한 애도와 심슨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에 쏠렸다.
보스니아 내전에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은 강대국들의 정치적인 이유는 가려지고 폭탄을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위한 ‘신사적인’ 조치로 붕대와 약품, 식료품이 지급되었다. 인종차별주의라는 ‘탈감정적’ 가치는 사람을 죽인 심슨에게 면죄부가 되었다.
모르는 사이에 조작된 감정이 여론을 형성하고, 그 여론은 어쩌면 진실한 감정에서 나올 결과를 왜곡시킬 수 있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감정은 단조롭고 대량생산되면서, 쉽게 조작될 수 있는 현상으로 변형되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은 나의 분노, 나의 연민이 아닐 수 있다. 그러한 경험 속에서 이견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생활은 마치 잘 관리된 기계처럼 돌아간다.
감정에 벨트를 채우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동정심도 하나의 사치품일 뿐이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는 여러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그만큼 각각의 입장에서 파생되는 감정도 다양하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너무나도 많이 기계적으로 발생하여 우리 주변에서 감정의 홍수를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믿고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하지만 단죄하지 못한다. 행복하지만 어딘가 불안하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던 선이 어느 정도 분명했던 예전과는 달리, 옳은 것에 희열을 느끼고 그른 것에 화를 내는 감정적 카타르시스가 사라졌다.
이렇게 모호해진 감정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만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보이는 가면을 쓰고 행동할 뿐이다. 멋지게 포장되어 겉으로 표현될 뿐인 감정은 행위의 동력이 되지 못하는 하나의 ‘사치품’이 되고 만다. 우리는 점점 진정한 감정에 둔감해지고 있다.
데이비드 리즈먼은 이 책 머리말에서 독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살펴보게 되고 또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도 되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다 보면 조금은 불편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 불편한 마음이 들려주는 진짜 감정의 목소리를 새삼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