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 예찬

조르조 아감벤 · Humanities
2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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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속화와 세속화란 무엇인가. 환속화는 억압의 형식이다. 환속화는 자신이 다루는 힘을 그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만 함으로써 이 힘을 고스란히 내버려둔다. 이와 반대로 세속화는 자신이 세속화하는 것을 무력화한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은 다시 세속화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왜 자본주의가 종교의 환속화가 아니라 근대적 종교 자체인지, 그 자체로 종교적 현상인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드는지, 우리 주변을 에워싼 온갖 장치들이 어떻게 이런 질서를 유지·강화하는지, 어떻게 하면 인류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책 뒤에 수록한 옮긴이의 해설을 길잡이 삼아 아감벤의 독창적인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오늘날의 정치, 사회, 문화가 맞닥뜨린 진정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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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01. 게니우스 9 02. 마술과 행복 27 03. 심판의 날 33 04. 조수들 43 05. 패러디 55 06. 욕망하기 79 07. 스페키에스적 존재 81 08. 몸짓으로서의 저자 89 09. 세속화 예찬 107 10.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6분 137 옮긴이 상세 주석 141 간주곡 II/Intermezzo II 호모 프로파누스: 동일성 없는 공통성의 세계로 181 찾아보기 233

Description

오늘날 왜 다시 세속화를 얘기하는가 ? 우리는 ‘환속화’와 ‘세속화’를 구별해야 한다. 환속화는 억압의 형식이다. 환속화는 자신이 다루는 힘을 그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만 함으로써 이 힘을 고스란히 내버려둔다. 이와 반대로 세속화는 자신이 세속화하는 것을 무력화한다. 막스 베버 이래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중세를 지배한 종교의 힘이 근대의 합리주의와 개인주의에 자리를 내주면서 근대 자본주의 세계가 등장했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흔히 ‘세속화’(secularization)라고 불렸던 이 사태는 오늘날 의문시되고 있다. 특히 9·11사건 같은 스펙터클한 사태에서 프랑스 내부의 히잡 논쟁과 우리나라의 봉은사 땅 밟기 같은 촌극에 이르기까지 최근 종교가 분쟁과 갈등의 주된 요소로 자주 재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되묻기 시작했다. 과연 이 세계는 충분히 세속화됐는가? 세속화 과정을 뚫고나온 종교의 힘은 무엇인가? 이념적 성향을 막론하고 전 세계의 비판적 지성들이 부쩍 ‘종교’라는 쟁점에 매달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데,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 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는 오랜 역사를 지닌 이 세속화 관련 논의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도입한 화제작이다. 아감벤은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신은 위대하지 않다』)처럼 종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세속화를 더 철저히 완수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슬라보예 지젝(『이웃』, 『죽은 신을 위하여』)이나 테리 이글턴(『신을 옹호하다』)처럼 종교 본연의 급진적 유산을 되살리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아감벤은 종교란, 세속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아감벤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화두는 상당히 도발적이다. 무엇보다 아감벤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가 대변/은폐하고 있는 성스러운 것의 법적인 기원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종교 이전에 존재한 법, ‘성스러운 질서’의 구조 자체를 문제 삼아야지 그 외형인 제도만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세속화와 진정한 세속화(profanation)를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전자가 속세의 권력(군주?국가)을 천상의 권력 모델과 뒤섞음으로써 권력 자체를 존속시킨다면, 후자는 성스러운 질서의 장치들을 비활성화해 완전히 무력화한다. 이 구분을 따라 우리는 전자를 ‘환속화’로, 후자를 ‘세속화’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근대 세계의 형성·조직 원리로서의 세속화 개념을 철저히 해부하는 『세속화 예찬』은 왜 자본주의가 종교(특히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환속화가 아니라 근대적 종교 자체인지, 그 자체로 종교적 현상인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드는지, 우리 주변을 에워싼 온갖 장치들이 어떻게 이런 질서를 유지·강화하는지, 어떻게 하면 인류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책 뒤에 수록한 옮긴이의 해설(200자 원고지 2백 매 분량)을 길잡이 삼아 아감벤의 독창적인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오늘날의 정치, 사회, 문화가 맞닥뜨린 진정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될 것이다. 세속화야말로 도래할 세대의 정치적 과제이다 ‘세속화하다’는 사물을 인간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돌려준다는 뜻이었다. ‘사용하기’와 ‘세속화하기’ 사이에는 명확하게 해야 할 특별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일단 세속화되고 나면 사용할 수 없고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려진다. 아감벤에게 종교는 망상이나 허위의식, 이웃사랑의 윤리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분리’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종교’의 어원은 어원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묶고 통일하는 것”을 뜻하는 렐리가레(religare)가 아니라 렐레게레(relegere), 즉 ‘다시 읽다’(rileggere)이다. “신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채택되어야만 하는 세심함과 정중함의 태도” 등을 함축하는 렐레게레가 종교의 어원이란 것은 종교가 인간과 신들의 통합이 아니라 양자가 분리된 상태 자체에 신경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아감벤은 해석한다. 즉 종교란 사물, 장소, 동물, 사람을 공통의 사용에서 분리해내고, 그렇게 분리된 것을 천상이나 지상의 신들이 배타적으로 사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들의 배타적 소유가 된 것을 고대인들은 ‘성스러운 것’ 혹은 ‘종교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이렇듯 성스러운 것이나 종교적인 것은 신들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판매되거나 저당 잡힐 수도, 그 용익권을 양도하거나 지역권이 부과될 수도 없었다. 기존의 종교사학자들이나 법제사학자들이 ‘희생제의’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런 과정을 매개한다. 요컨대 종교는 일차적으로 인간과 신들을 분리하고, 그 다음으로 희생제의라는 의례를 통해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리한다.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고대 로마법의 이런 재산권 개념을 그 안에 융합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환속화가 교회의 자산이 세속의 손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했던 이유가 이 때문인데, 아감벤이 말하는 성스러운 것의 법적인 기원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아감벤이 왜 자본주의를 근대적 종교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으로 전환되지 않는 성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소비를 통해서만 대상과 사물(심지어 공기, 물, 공간, 시간까지)에 접촉할 수 있을 뿐 그 무엇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고대 세계에서 이런 사용하기의 불가능성을 매개했던 것이 희생제의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적)소유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요컨대 소유란 희생제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로운 사용을 일종의 분리된 영역으로 옮기는 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종교의 극단화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종교를 특징짓는 분리의 구조를 모든 영역에서 일반화·절대화하기 때문이다. 『세속화 예찬』의 자매편 격인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에서 아감벤은 ‘장치’(dispositio)의 어원이 그리스도교 교부들에 의해 재해석된 ‘오이코노미아’(oikonomia), 즉 가정의 관리·경영임을 보여줌으로써 경제의 신학적 기원을 언급한 바 있다. 『세속화 예찬』에서 아감벤은 이런 장치들에 의해 분리가 일반화·절대화된 과정을 ‘세계의 박물관화’라고 부른다. 우리는 오늘날 박물관 안의 유리진열장에 담겨 전시되는 것과 같은 형태로만 대상과 사물을 마주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속화가 도래할 세대의 정치적 과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대 사회에서 세속화가 성스럽나 종교적이었던 것을 인간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되돌리는 것이었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속화는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지탱해주는 핵심 구조, 즉 장치-소비-(사적)소유로 이뤄진 분리 일체를 전복하는 전략이다. 요컨대 오늘날 인간이 공통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사물과 대상만이 아니다. 우리는 장치들이 포획해 상품화한 모든 것 ――― 인간의 언어능력, 섹슈얼리티,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교감과 소통의 능력, 즉 삶/생명의 잠재성 일체를 모두 되찾아와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종교적 권력은 언제든 인간을 다시 집어삼킬 것이다. 『세속화 예찬』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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