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추구한 라이트를 만난다 VS 현대 도시의 풍경을 만든 미스를 만난다 현대 건축의 두 선구자, 라이트와 미스를 다룬 결정판 현대 건축을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첫 관문인 라이트와 미스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해 주는 건축 교양서. 괴팍하고 낭비벽이 심했으며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라이트의 일생이 로비 하우스, 낙수장, 구겐하임 미술관 등의 건축물들과 어우러져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또한 모더니즘 건축의 정점이자 그 폐해의 주범으로 평가받는 미스의 삶은 크라운 홀, 시그램 빌딩,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등의 작품들과 함께 기술되어, 왜 미스의 건물이 추종자의 것들보다 뛰어난지를 증명한다. 저자는 이 두 선구자의 이야기를 통해 건축이 단순한 부동산 이상의, 우리 삶을 담는 문화임을 알려 준다.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인 저자가 9년 동안 연구하고 모은 자료들을 집대성한 이 책은 일반인들이 건축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전문 용어의 사용을 최소화했으며 최대한 쉽게 풀어 썼다. 저자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찍었거나 주요 아카이브에서 구입한 사진들, 라이트와 미스가 직접 그렸거나 그 원본을 참조로 하여 저자가 다시 그린 도면과 스케치 등 총 500점의 귀한 도판들이 이 책의 소장 가치를 높여 준다. 라이트, 유기적 건축을 추구한 천재 건축가 건축가로 활동하던 70년 동안 끊임없이 실험을 거듭하면서 기존 건축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그는 초기의 10년간은 주택 건축가로 인정받았지만, 그 뒤의 20여 년 동안은 한물간 인물로 취급받다가 말년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처럼 굴곡 많은 건축 활동과 마찬가지로 그의 삶 또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라고 생각했고 동료 건축가들을 무시했다. 건축주에게 자신의 경력을 부풀려 말하기도 했으며, 한때 조수였던 사람에게 있지도 않은 특허권을 거짓말로 팔아먹었다. 또한 첫 번째 아내와 6명의 자식을 버려둔 채 새 연인과 유럽으로 도망갔고 그 뒤로도 여러 스캔들 끝에 세 번째 결혼에 이르러서야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건축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실제 빌딩 너머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계한 건물에 어울리는 가구와 커튼, 심지어 잠옷을 디자인해서 건축주에게 쓰도록 강요했고, 원래 예산에서 몇 배의 초과 비용을 발생시켰으며, 검증되지 않은 새 재료와 건축 방법을 사용해서 비가 새거나 환기가 되지 않거나 캔틸레버가 처지는 상황을 초래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라이트는 그칠 줄 모르는 실험 정신을 통해 일상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도 동시에 예술작품이 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 주는 건축을 실현해 냈다. 무엇보다도 그의 건축은 주변의 자연과 건물의 내외 공간을 상호 침투시킴으로써 공간 안의 인간을 자연으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집을 실험장으로 삼다: 홈 앤드 스튜디오, 탤리에신 라이트의 초기 건축은 시카고 교외의 오크 파크(Oak Park)에서 시작되었다. 라이트는 1889년에 이곳에다 집을 짓고 첫 번째 아내와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이 집은 이후로 세 번의 증축을 거쳐 홈 앤드 스튜디오(Home and Studio)로 거듭난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퀸 앤 양식(Queen Anne style)을 띠었던 건물은 라이트만의 프레리 양식(Prairie style)으로 변해 갔다. 라이트는 새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신의 집에 먼저 적용해 보았는데, 이에 따라 홈 앤드 스튜디오의 벽과 창문은 크거나 작게 계속 변경되었다. 이 건물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아이들의 놀이방이다. 이 놀이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둡고 좁은 복도를 거쳐야 하는데, 놀이방에 도착하면 천창(天窓, 지붕에 낸 창)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넓고 환한 공간으로 전이되는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어둡고 좁은 공간을 미리 장치해 놓은 것이다. 이후로 라이트는 이 방식을 평생에 걸쳐 사용했다. 1909년, 라이트는 가족이 있는 홈 앤드 스튜디오를 떠나 새 연인 매이마와 함께 유럽으로 향했다. 그리고 1년 뒤에 돌아와 스프링 그린에 탤리에신(Taliesin)이라는 새 보금자리를 지었다. 이 건물은 언덕 위의 정상에서 약간 비낀 곳에 세워졌는데, 그 때문에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우러진다. 이곳 역시도 라이트가 새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마다 그것을 적용해 보는 실험장이 되었다. 탤리에신은 또한 라이트에게는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곳이었는데, 라이트가 시카고에서 공사 감독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일꾼 한 명이 탤리에신에 불을 지르고 도끼를 휘둘러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고 이때 연인 매이마와 그녀의 아이들도 희생당했다. 라이트는 불에 탄 탤리에신을 복원했지만, 죽은 연인을 잊지 못했다. 결국 라이트는 세 번째 아내(중간에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파국으로 끝난다)를 만나기 전까지 10여 년간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주변 환경에 따른 건축을 만들다: 로비 하우스, 낙수장 라이트의 건축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주변의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건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프레리 양식의 전형인 로비 하우스(Robie House)와, 미국건축가협회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 건축’으로 선정한 낙수장(Fallingwater)이다. 로비 하우스는 유럽 양식을 모방하지 않고 미국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미국만의 독특한 스타일, 즉 프레리 양식을 추구한 작품이다. 19세기 말의 미국에서는 주택에 유럽식으로 포치(porch, 지붕이 있는 현관)를 달았는데, 집주인은 이 공간에서 행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라이트는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포치에서 담소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에 과감하게 포치를 없애고 거리에서 출입구가 잘 안 보이도록 집 방향을 돌렸다. 또한, 라이트는 두꺼운 벽들로 막혀 있던 내부 공간을 모두 뚫고 방들을 대각선 위에 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면서 공간을 발견하도록 했다. 이렇게 박스 형태를 해체하여 널찍한 대지와 호응시킨 것이 프레리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이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건축인 낙수장은 라이트가 설립한 탤리에신 펠로십에 참가했던 한 실습생의 아버지가 의뢰한 것이다. 의뢰인은 베어 런이라는 폭포 옆에 별장을 지어 달라고 했지만 라이트는 폭포가 쏟아지는 바위 위에다 낙수장을 세웠다. 낙수장은 ‘대지에서 자라 나온 건축’을 지향한 유기적 건축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정수다. 3시간 만에 설계를 끝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 건물은, 그러나 라이트가 설계 당시에 바닥의 철근 보강에 부주의한 탓에 완공 직후부터 보수 공사가 계속되어야만 했다. 새로운 건축을 추구하다: 존슨 왁스 빌딩, 구겐하임 미술관 라이트는 자신의 건축에서 끊임없이 모험을 추구했고 새로운 경향이 유행할 때 그것에 재빨리 적응했다. 1936년에 설계한 존슨 왁스 빌딩(Johnson Wax Building)은 당시에 유행하던 유선형 형태, 첨단 재료인 파이렉스 글래스 튜브(pyrex glass tube), 수련 잎을 닮은 콘크리트 기둥을 사용한 건물이다. 여기서 라이트는 직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두가 한 방에서 같이 일하는 민주적인 건축을 구현했는데, 이 건물로 옮기고 나서 생산성이 15퍼센트 이상 늘어났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그러나 이 건물은 천장에서 비가 새는 등 기술적인 부분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말년의 역작이자 많은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킨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은 완공까지 16년이나 걸린 프로젝트다. 초기의 의뢰인이었던 솔로몬 구겐하임이 죽고 담당자마저 바뀌면서 설계안의 내용이 몇 차례나 뒤집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