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몸속에 또 다른 몸이 찾아오는 시간 타자와 나 사이에 흐르는 물의 환상통로 2001년 『포에지』로 등단한 신영배는 여성성의 내밀한 미감에 몰두하며 2000년대 한국 시단에서 ‘여성적 시 쓰기’의 새로운 연대를 예고하는 강렬한 징후를 보여준 시인이다. 현대 시의 미학적 전위가 ‘여성적 상상의 모험’이라는 전선을 따라 이동해왔다면, 신영배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진은영, 김이듬, 이기성 등과 함께 육체 속에 불온한 다성성(多聲性)을 폭발시키며 ‘마녀적 무의식의 시’(문학평론가 오형엽) 지형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신영배는 ‘물과 그림자의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환영적인 존재를 몸에 대입하여 원초적이고 기이한 상상적 세계를 그려내왔다. 시인은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에서 그림자를 변주하여 상상적 모험을 감행하고 자기 감각과 형태의 한계를 넘어가는 예술적 자유의 도정을 펼쳤고 최근 시집 『물속의 피아노』에서 물인지 피아노인지 알 수 없는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불완전한 음향, 무음의 연주에 담긴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여성적 몸이 체험하는 상상적 모험의 원류인 신영배의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가 2015년 1월 다시 독자들을 찾아간다. 2006년 문학·판에서 출간되었던 이 책은 문학과지성 R 시리즈로 9년 만에 새 옷을 입으며 목차의 구성이 새로 짜였고, 시편들도 좀더 정제된 시어와 문장 들로 다듬어졌다. 독자들은 신영배의 ‘물의 담화’가 시작되는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 의미와 무의미의 틈을 탈경계화하는 신영배 시의 미학적 깊이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몸속에서 벌어지는 ‘물’의 사건 몸속에 소녀가 들어서는 때가 있다 애 들어서듯이 내 몸에 입덧을 치는 소녀가 있다 어둠 속에서 그런 날엔 암내도 없이 내 몸은 향기롭다 내 몸에 소녀가 들어서는 날을 어떻게 알고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온다 이십 년 전 죽은 젊은 얼굴을 하고 소녀를 찾아온다 그러고는 운다 소녀는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본다 소녀도 운다 말간 몸뚱어리를 물처럼 서로의 몸에 끼얹어주는 풍경 눈물이 내 몸속에 양수처럼 차오른다 내 몸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시간 소녀도 아버지도 빠져나가고 나면 내 몸은 누운 채로 보얗게 굳어 있다 - 「욕조」 전문 「욕조」는 내 몸속에서 벌어지는 ‘물’의 사건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한때 물을 담았고 어느 순간 물이 빠져나가는 공간으로서의 ‘욕조’는 수용적인 공간인 동시에 궁극적인 부재의 장소라는 맥락에서 ‘여성적 몸’을 상징한다. 먼저 욕조에 누운 내 몸속에 소녀가 들어선다. ‘들어선다’는 표현이 말해주듯 이것은 화자가 소녀로 전환되는 일이 아니고 하나의 몸 안에 다른 몸이 시작되는 사건이다. 몸이 다른 몸의 ‘방문’을 받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미 들어선 소녀의 몸 안으로 “이십 년 전 죽은 젊은 얼굴”을 한 아버지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은 운다. ‘소녀의 몸’과 ‘아버지의 몸’은 ‘눈물-물’을 매개로 섞인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시집 해설에서 신영배의 물이 ‘가변적이고 수행적인 존재’라는 점을 지적한다. “물은 하나의 형태로 규정되지 않는다. 물은 도처에 스며들어 있고, 순식간에 넘쳐나거나, 갑자기 증발한다. 물은 존재를 씻기고 또한 실어 나른다”(해설, 「흐르는, 증발하는 그녀들의 환상통로」). ‘몸-물’ 속에서 타자들은 만나고 서로 스며들다가 증발로써 다시 빠져나가고 굳는다. 내가 나를 낳아 내 몸 밖으로 내보내는 서사 문을 따고 들어서니 침대 위에 낯선 얼룩 내 사타구니쯤 [……] 베개 위에 찍힌 발자국 그 위로 떨어지는 깃털 높고 어두운 곳의 붉은빛 흠칫 마주치는 눈동자 장롱 위에 앉은 비둘기 그 틈, 골반만큼 벌려놓고 장롱에서 창문까지 날개의 동선을 그려 비둘기 붉은 눈 앞에서 양팔을 벌리고 자 따라해 퍼덕퍼덕 하늘 나는 시늉을 해 자 이렇게 창문 밖으로 날아 다시 장롱에서 창문까지 날아 이렇게 내 몸이 붕 떠오르네 내가 내 골반을 빠져나가는 이야기 -「환상통로」 부분 이 시집에서는 물과 동시에 피의 이미지가 도드라진다. 피는 투명성과 유연성 대신에 점액질의 육체성을 지닌다. 「환상통로」에서는 이러한 피가 비둘기로 날아가는 극적인 전이 과정을 보여준다. 월경 중인 ‘그녀-여성적 육체’가 마주한 비둘기라는 이미지는 “내가 내 골반을 빠져나가는 이야기”로 전이되어 날아간다. 비둘기의 비상은 월경이자 해산이며 몸이 다른 몸을 생성하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신영배는 내가 내 몸 밖으로 출산되는 과정으로서의 ‘피-이야기’를 시적 서사로 구체화하며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 ‘나’와 ‘타자’의 경계를 넘어서 ‘그녀-몸-물’의 환상통로를 구축한다. 몸속에 내재한 원초적인 기억들, 아픔과 고통이 육화되는 신영배의 시 세계는 물의 상상으로 다채롭고 자유롭게 뻗어나간다. 구체의 의미에 가닿지 않고 꾸준히 빗겨 흐르는 미끄러운 신영배의 ‘몸-물’은 도식적인 상징체계에 갇히지 않고 풍요로운 공간을 구축하며 시적 모험의 원천으로 계속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