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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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로 떨어진 앨리스가 보내는 촛불처럼 따뜻한 위로와 저항의 언어 전방위적인 작가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는 신현림 시인의 다섯 번 째 시집 『반지하 앨리스』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이후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침대를 타고 달렸어』를 펴내며 당대의 제도권적 여성 담론을 뒤흔든 가장 전위적인 여성 시인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반지하 앨리스』에는 연작시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를 비롯해 68편의 시가 실렸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반지하에 불시착한 앨리스들의 애환에 주목한다. 그러나 가난의 뿌리를 적나라하게 털어놓는 솔직함에는 언제나 삶의 의지를 놓지 않는 ‘사랑’이 있다. “쓸쓸한 나와 같은 너를 찾아/ 슬픔에 목메며/ 슬픔의 끝장을 보려고/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처절한 고백은 삶의 고통과 아픔에 몰입하는 대신 함께 슬퍼할 사람을 찾고 그 슬픔을 견딤으로써 오히려 슬픔의 끝장을 보는 힘이 된다. 겉치레와 위선 없이 마음의 밑바닥까지 말하는 『반지하 앨리스』는 신현림 시인이 반지하 세계에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보내는 생존신고이자, 함께 더 잘 살아 보자는 위로의 편지다. 세상을 바라보던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인 시선은 세월호 참사와 촛불 집회라는 동시대 사건을 겪으며 애도와 희망 쪽으로 품을 넓혔다. 차 벽과 의경이 아닌 촛불과 시민들로 가득 찼던 광화문 광장은 시인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 주는 문학적 사건이 되었다. 시와 더불어 위안부 소녀상과 촛불 집회의 사진을 수록함으로써 더욱 현장감 있게 동시대성을 표현한 『반지하 앨리스』는 신현림 시인이 살아가고 있는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절망을 극복하는 도발적인 아름다움 절망의 이 옷을 벗겨 줘 무력감에 찌든 살과 뼈를 태워 줘 물고기처럼 바다 위로 솟아올라 다시 펄펄 살아나 살 아 서 하늘 끝까지 튀어 오르게 ―「절망의 옷을 벗겨 줘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3」 『반지하 앨리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죽음에 저항하며 삶을 이어나가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라는 선언적인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연작시는 시집에서 새로운 제목으로 독자들을 찾아간다. 절망으로부터 도약하는 순간을 포착한 이 시에서는 맨몸으로 마주한 두 연인이 있다. ‘나’의 힘만으로는 떼어낼 수 없는 절망을 벗기 위해서는 ‘너’의 손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벗을 수 없는 ‘절망의 옷’을 벗겨 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이 있기에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절망으로부터 탈출하는 이 애틋한 에로티시즘의 순간은 죽음의 반대편에서 생명을 만드는 사랑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문학적 성찰로 바라보는 삶의 깊이 세월은 내 발을 코끼리 발처럼 두툼하게 만들었다 땅을 어루만지는 발 느리게 춤추는 발 속삭이는 발 너도 코끼리가 되기 전에 할 일은 살아있음에 고마워하기 바람 부는 땅에 입맞춤하기 ―「코끼리가 되기 전에」에서 아무도 세월에서 빗겨날 수 없기에, 신현림 시인은 더 풍요롭게 나이 드는 법을 택한다. 시간이 쌓여 두툼해진 발은 곧 살아온 삶의 경험과 궤적이다. 인생의 우여곡절로 발바닥에 베긴 굳은살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각하게 한다.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 만지고 맞닿으면서 삶 자체를 음미하는 발은 결국 살아 있기에 얻게 된 새로운 감각이다. 죽음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던 시간을 이겨낸 끝에 쟁취한 작은 평화이기도 하다. 시인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지금 그가 서 있는 자리에 감사해 한다. 근사하고 지혜로운 코끼리가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사진전 「반지하 앨리스」 8월 1일부터 류가헌에서 열려 토끼 굴에 빠져든 백 년 전의 앨리스와 돈에 쫓겨 반지하로 꺼져 든 앨리스들과 만났다 ―「반지하 앨리스」에서 이번 시집과 같은 제목으로 8월 1일부터 8월 10일까지 류가헌에서 열리는 사진전 「반지하 앨리스」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발휘되는 시인의 예술적 감각을 증명한다. 시인에게 ‘반지하’는 곧 삶의 터전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시인은 시를 쓰고, 아이를 키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골라낸다. 반지하는 시인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받는 근원인 동시에 그 상처를 바탕으로 삶의 애환을 시로 담아낼 수 있도록 만드는 문학의 공간이다. 이름에서부터 지하도 지상도 아닌 경계를 가리키는 반지하는 한 아이의 엄마인 동시에 시인이고, 사진작가인 동시에 화가인, 언제나 경계 사이에 존재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신현림을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언어와 이미지라는 각각의 독립된 작업 형식으로, 시와 사진의 미학을 담는 두 개의 ‘반지하 앨리스’는 시인이 지난 10여 년간 바라본 우리 시대의 역사와 삶의 고뇌가 긴밀히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