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라파엘 젤리히만 and other ·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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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독재가 어떻게 가능했을지 살핀다. ‘독일국민의 집단적 애국주의와 히틀러의 공모’라는 관점에서 히틀러의 독재를 조명하고 ‘애국’이란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일국민의 사회심리학적 상태를 확인한, 새로운 시각의 히틀러 평전이다. 히틀러의 삶, 주로 독일정치계에 입문하여 최후를 맞기까지의 정치적 행보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전쟁의 전개과정, 히틀러를 끝까지 신뢰한 독일국민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독일과 유럽 각 국가들 간의 복잡한 관계를 분석하며 히틀러와 독일국민의 집단애국이 어떻게 공명하여 결국 비극적인 종말로 치닫는지를 연대순으로 서술한다. 히틀러는 독일국민의 애국심을 이용하여 끝까지 권력을 지켰으며, 독일국민 또한 히틀러가 뿌려놓은 애국이라는 밑밥에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히틀러와 독일국민의 공모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히틀러 자신의 카리스마와 더불어, 근대로 나아가기를 두려워 한 독일국민의 두려움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한 마법의 공간"

35주년 기념 재개봉,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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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마법의 공간"

35주년 기념 재개봉,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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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머리말-독일국민은 왜 독재자 히틀러에게 열광했는가 제1부 히틀러, 나치, 독일 이제는 검이 말하게 하라 1919 몽상가, 독학자, 딜레탕트 1889~1914 군대로 도피하다 1914~1919 허풍선이인가 독일의 희망인가 1919~1923 반역 1923.11.9. 물밑작업 1924~1926 변화의 징조 1925~1929 동원 1930~1931 독일이여, 신과 함께 전진하라 1932~1933 제2부 총통과 그의 국민 법과 질서 속에서 혁명을 1933 독일이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1933~1934 장검의 밤 1934. 여름 평화라는 이름의 전쟁 1933~1937 전쟁 준비 1937 유화정책과 시간 벌기 1938 유대인 몰이사냥 1938.11. 은폐된 전쟁에서 공공연한 전쟁으로 1938~1939 전쟁을 위한 백지수표 1939 제3부 추락하는 국가 안락사와 신중한 저항 1939~1945 국민과 총통이 함께 승리하다 1940 생존공간 확보를 위한 말살정책 1941~1943 총력전 1943 이탈리아인들의 이성적인 배신 1943~1944 저항은 소용없는 일? 1933~1945 영웅성과 자기 기만 1944.7.20. 민족 대학살 1941~1945 대가 1945 인명 찾아보기

Description

누가, 왜, 독재자를 만들었는가! 반세기 전 인류는 5,000만 명 이상의 사상사와 생체실험, 유대인과 장애인 대학살 등 히틀러가 벌인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며 한 독재자의 광기가 낳은 결과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각계의 평가에서 히틀러는 언제나 정중앙에 놓여왔으며, 현대사에서 히틀러만큼 한 개인의 삶이 끊임없이 연구되어온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독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히틀러와 그가 일으킨 전쟁을 이해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정중앙의 히틀러 뒤에 희미하게 처리된 7천만 독일국민이다. 현재까지도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금서로 여겨지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나치정권 당시 독일에서 1,000만 부 가량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히틀러와 독일국민 사이를 이어준 단단한 연결고리가 무엇이었던가를 묻게 한다. 히틀러와 그의 국민을 조명한 새로운 시각의 히틀러 평전 신간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는 ‘독일국민의 집단적 애국주의와 히틀러의 공모’라는 관점에서 히틀러의 독재를 조명하고 ‘애국’이란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일국민의 사회심리학적 상태를 확인한, 그동안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의 히틀러 평전이다. 저자인 라파엘 젤리히만는 이 책에서 히틀러의 삶, 주로 독일정치계에 입문하여 최후를 맞기까지의 정치적 행보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전쟁의 전개과정, 히틀러를 끝까지 신뢰한 독일국민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독일과 유럽 각 국가들 간의 복잡한 관계를 분석하며 히틀러와 독일국민의 집단애국이 어떻게 공명하여 결국 비극적인 종말로 치닫는지를 연대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관점은 요아힘 C. 페스트와 이언 커쇼가 쓴 히틀러 전기와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저술에서는 뚜렷이 보이지 않았던 독일국민을 선명하게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으며, 나아가 애국이 집단적 광기로 표출될 때 돌이킬 수 없는 참상을 낳을 수 있음을 오늘날 우리 사회에 경고하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독일의 성숙함을 보여준 한 권의 반성문 저자 라파엘 젤리히만은 독일의 《벨트》(Die Welt)지 편집인과 뮌헨 대학교 국제관계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슈피겔》 《슈테른》 《타츠》 등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각종 언론에 비중 있는 에세이를 써 독일사회에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명망 있는 저널리스트다. 그는 2004년 이 책의 출판기념회에서 『나의 투쟁』을 성숙한 독일국민이 사서 볼 수 있게 판매금지 목록에서 지워야 한다고 촉구하여 독일사회를 한바탕 시끄럽게 하기도 했다. 히틀러를 독재자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국민의 광신적 애국주의, 즉 이성을 잃어버린 집단애국이었다는 점을 전제로 그 역사적 전개를 보여주는 이 책은 오늘날 독일국민의 성숙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특히 집단애국이 극명하게 표출된 근래의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 즉 9.11 테러로 촉발된 미국의 아프가니스칸 공격과 티베트 소요에 대한 중국의 무력진압 등과 비교해볼 때 더욱 드러난다. 히틀러를 지도자로 세운 선량한 시민들 히틀러의 정치인생을 살펴보기에 앞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민주적인 선거에서 1,700만 명의 독일인들은 왜 히틀러를 선택했을까?’ ‘어떻게 한 사회 전체가 유대인 대학살과 같은 일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저자에 의하면, 히틀러는 독일국민의 애국심을 이용하여 끝까지 권력을 지킬 수 있었으며, 독일국민 또한 히틀러가 뿌려놓은 애국이라는 밑밥에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독일국민의 공모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히틀러 자신의 카리스마와 더불어, 근대로 나아가기를 두려워 한 독일국민의 두려움을 들 수 있다. 과거 독일은 유럽의 중앙에 갇혀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조각조각 분열되어 있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 따라 정치적으로 거의 300개 지역으로까지 분할되어 단일한 정신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던 독일에게 근대적 사유는 혼란과 폭력의 동의어일 뿐이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점령당한 데 대한 굴욕감은 그런 독일의 민족주의에 불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 독일민족을 선민으로 표현한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1807/08)과 게르만 신화로의 회귀를 음악으로 완성한 바그너의 사유도 여기에 잇닿아 있다. 나아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망에 따른 민족적 자존심의 손상과 악화된 경제상황은 독일국민으로 하여금 적을 찾게 했다. 독일국민이 발견한 내부의 적, 유대인 독일국가의 적은 독일사회 내부에 있었다. 그들은 바로 ‘근대화’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이었다. 당시 독일인구의 1퍼센트를 넘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유대인들이었지만, 독일인 노벨상 수상자 중 4분의 1, 판.검사의 6퍼센트, 변호사와 공증인의 15퍼센트, 의사의 7퍼센트, 언론인과 작가의 8퍼센트가 유대인이었으며, 섬유산업의 40퍼센트, 백화점 유통망의 5분의 4가 유대인 소유였다. 베를린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유대인 중심지로서 자기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의 5분의 1 이상, 150개 민영 은행 중 3분의 1이 유대인의 손에 있었다. 이렇게 볼 때 1700년 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유대인을 추방하지 않았던 독일이 19세기 후반부터 유대인과 본격적으로 갈등을 일으켰던 이유는 민족과 종교에 기인한다기보다 독일국가의 재탄생을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독일국민은 히틀러의 선동에 따라 모든 악의 근원인 유대인을 뿌리부터 뽑아낼 때 독일민족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정치사상 유례없는 나치당의 성장 1919년, 히틀러가 입당한 해의 9월에 독일노동자당(이후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일명 ‘나치당’으로 바뀜)은 당원이 백 명가량에 불과한 국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소시민들의 정치모임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선동으로 1922년 당원이 4,000명으로 늘어났으며, 일 년 후에는 6만 명에 달했다. 당원의 절반은 수공업자와 점원, 농부, 공무원, 중하층이었고, 3분의 1이 노동자였다. 1928년 공화국 의회선거에서는 81만 명이 지지했으며, 12명의 의원이 당선되었다. 당원은 약 17만 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지지기반이 약했다. 그러나 2년여가 지난 1930년 9월 투표에서는 650만 명의 지지자와 107명의 의원이 당선되었다. 이것은 독일 역사상 한 정당이 이룬 가장 엄청난 도약으로서, 나치당원의 평균연령은 30세 이하였으며 여성은 10분의 1도 안 됐다. 히틀러에게 지지를 표한 사람들의 4분의 3이 개신교 신도였으며, 부르주아와 자영업자, 고소득자도 많았지만, 당의 가장 막강한 근거지는 농촌이었다. 일 년 후 투표에서는 1,700만 명의 유권자가 나치당에 표를 던지고 의석은 230석으로 늘어났다. 히틀러의 독재에 유혹당한 독일의 애국자들 유혹자 히틀러가 외친 것은 시종일관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독일민족의 혁명”이었으며 독일국민은 그런 그에게서 독일의 희망을 발견했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실제로 모든 것을 동원했다. 히틀러는 에른스트 룀, 하인리히 힘러,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등 필요한 사람은 모조리 자기편으로 만들어 평생 마법처럼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 중에는 학식이 풍부한 엘리트도, 군 장성도 있었지만 그의 단순명쾌한 논리 앞에서 복종을 맹세할 뿐이었다. 또한 히틀러는 나치돌격대, 친위대, 독일청소년단, 독일소녀단, 히틀러 유겐트, 독일소녀연맹, 전국농업협회, 나치대학생연맹, 나치교수연맹, 나치 교사연맹 등 남녀노소, 직업과 계층을 불문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직으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그 중 많은 수가 자발적인 애국심에 나온 것이었다. 《필키셔 베오바흐터》 《도이체 폴크스빌레》 등 각종 언론들도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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