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을 정주행하시겠습니까?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은 욕망,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아닌 존재가 되는 일,
알고 보니 내 인생이 아닌, 그러나 이토록 내 인생인 이야기들!
젊은 작가 7인의 ‘빙의물’ 테마소설집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하면서 여러 매체를 통해 ‘다시-살기’라는 아이디어가 소비되고 있다. 은행나무출판사에서는 테마소설집 시리즈 ‘바통’의 일곱 번째 기획으로 ‘빙의물’을 다뤄보고자 했다. 이종산 조시현 현호정 한정현 박문영 박서련 정수읠, 고유하게 반짝이는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 7인이 ‘빙의물’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해냈다. 앤솔러지 《내 인생이 알고 보니 내 인생이 아님》을 통해서다.
현대사회 속 개인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아닌 존재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며, 어떤 순간에는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어떤 초월적 힘이나 예지를 통해 현실을 바꿔나갈 힘이 있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빙의물’은 이러한 기대를 자극하며 이 평범한 현실로부터 여기가 아닌 어떤 세계로 탈출할 가상의 출구가 되어준다. 앤솔러지에 참여한 7인의 작가들은 전통적 의미의 ‘귀신 들림’을 차용한 소설부터, 장르적 문법에 따라 읽던 책 속으로 빙의하는 내용까지, 일곱 가지 방법으로 새로운 현실에 접속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견 지금의 현실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몸짓으로 보이는 이 ‘새로운 세계로의 접속’은 오히려 더 명징하게 현실을 조명한다. 빙의의 순간은 나와 타자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타자의 육체 속에서 주체는 오히려 주체로서 명확해지며, 이 순간 주체의 욕망은 오롯하게 주체의 것이 된다. 한편 빙의물은 정보의 불균형이 주는 통쾌한 순간, 혹은 그것이 깨지면서 발생하는 새로운 긴장의 순간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카타르시스와 서스펜스는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선사하며, 어떤 미래에서 내가 나를 구하는, 이야기로 삶을 구원하는 순간을 만끽하게 한다. 이런 순간을 통해 독자는, 문화연구자 안상원의 말처럼 “벗어나려던 현실과 스며들려던 현실이 한끝 차이라는 것을, 내 인생이 알고 보니 어처구니없는 내 인생이었음을 알게”될 것이다.
“내가 아까 어떤 소원 빌었게?
네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어.”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은 욕망,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아닌 존재가 되는 일, 혹은 내가 아닌 존재에게 ‘들리는’ 일은 소설을 통해 새로운 인물에 진입하는 일과도 닮아 있다. 7인의 작가가 각자 어떤 방식으로 소설에 진입했는지 살피는 것은 앤솔러지를 읽는 큰 재미 중 하나이다.
전통적 의미의 ‘빙의’를 다룬 이종산의 <두 친구>에서는 친구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과 부채감, 그 안을 파고드는 음습한 마음을 귀신 들림과 연관 짓고 있다. 이 소설의 매력은 귀신 들림, ‘선을 넘어감’이 단순히 미쳐버리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의 선 너머에서 두 여자가 찾아내는 이해의 단초는 소설을 완전히 뒤바꿔 읽게 한다. 자신이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랑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현대판 지구 탄생의 신화를 그린 현호정의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 역시 빙의된 자의 입을 통해 말하도록 한다. 빙의자의 말, 지구의 탄생 신화 속에서 기생하는 존재와 자생하는 존재의 경계가 흐트러지고 지구의 탄생과 형성 과정을 망라하는 상상력이 펼쳐진다. 존재와 아름다움에 가닿게 하는 거대한 상상력이 독자에게 쏟아진다. 한정현의 <어느 날 여신님의 다리 위에 우리가>에서는 나쁜 관계를 끊어내준다는 일본의 하시히메 이야기를 통과하여 애도와 마주함의 순간을 그린다. 초월적 존재, 혹은 자신이 투영한 이미지를 통해 매듭짓지 못한 마음을 마주하는 순간, 그것을 향해 뛰어든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용서의 순간이 소설 속에 섬세하게 놓였다.
새로운 방식으로 빙의를 해석한 작품들도 있다. 인간이 모두 데이터화 되고 AI를 통해 랜덤한 확률로 인간의 몸으로 주입되어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조시현의 <크림의 무게를 재는 법>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슈크림 빵의 마음에 대해 적는다. ‘영혼은 슈크림’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슈크림 빵은 ‘마디’를 향한 애정과 등치된다. 그런 방식으로 소설은 우리의 영혼은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의 애정으로, 그 무게로 이루어졌을지 모른다는 다정하고 단단한 마음에 가닿는다. 박문영의 <덮어쓰기>에서는 이미지 덮어쓰기라는 기술적 발전을 통해, 불법 촬영물이라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를 조명한다. 가상적 방식으로 현실을 타개하는 것, 그것은 소설이 현실을 덮어쓰는 방식이기도 할 테다. 정수읠의 <이 시점에 문필로 일억을 벌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에서는 웹소설 세계에서 아이디를 바꾸면서 무수히 새로운 정체성에 접속하는 주인공을 다룬다. 현대의 새로운 정체성, ID를 통한 다시 살기에 대해 말하는 이 작품은 주인공의 물리적 삶과 대조를 이루며 DNA 구조처럼 현대인의 존재를 구성해 낸다.
장르로서 ‘빙의물’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른 작품도 있다. 박서련의 <니가 왜 미쳤는지 내가 왜 알아야 돼>에서는 자신이 읽던 추리소설의 결말을 모른 채 소설 속 한 인물로 빙의된 화자가 등장한다. 그는 소설 속 한 인물, 이제는 자기 자신이 된 인물을 따라 추리소설의 결말을 향해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보의 격차는 줄어들고, 결말은 다가온다. 화자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독자는 함께 그를 따라 고립된 스키장에서 지독한 긴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벗어나려던 현실과 스며들려던 현실이 한끝 차이라는 것을,
내 인생이 알고 보니 어처구니없는 내 인생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꿈이다. 개인이 삶의 주체가 되는 일은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거대 구조 속 개인은 ‘내 인생이 알고 보면 내 인생이 아’닌 것 같은 감각에 휩싸이고,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 지금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똑같은 세계로의 전이를 원한다기보다는 내가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곳으로의 이동을 원한다. 어떤 선험적 지식을 통해 새로운 현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이라는 질문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흥미로운 주제로 다뤄지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욕망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빙의물’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며 내가 아닌 내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소설이 내가 아닌 나를 조명하며 돌아오는 곳은 오히려 나와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일 테다.
빙의물은 본질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는 것,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잠시간 흐려지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순간 자아의 욕망은 더욱 선명해진다. 타자의 신체와 정체성을 획득하였을 때 무엇을 통해 나를 정의하게 되는가, 어떤 것이 ‘나의 것’이 되는가, 나는 어떤 것이 되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 더욱 선명해진다. 바야흐로 나의 욕망이 나를 정의하게 되는 순간이다. 한편 빙의물의 또 하나의 재미는 정보의 불균형을 통한 긴장이다. 빙의된 자는 빙의된 세계의 법칙을 모두 알고 있기도, 전혀 모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존재로서 가지고 있는 지식은 어떤 식으로든 격차를 유발하며, 이로 인한 통쾌하거나 난감한 순간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상황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지식의 격차가 점차 줄어들거나 상황적 제약으로 인해 우위가 지속되지 않을 때, 혹은 무지가 가져오는 뜻밖의 순간들이 발생할 때,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독자는 카타르시스와 서스펜스 사이를 오가며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 속의 ‘나’를 곤경에 처하게 하기도 그곳에서 살아남게 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새로운 삶을 쓰고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