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앤절라 카터는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다. 훌륭한 마법사이자 자비로운 마왕이며, 기괴한 우아함을 지닌 천재적인 풍자가다.” _ 살만 루슈디 『피로 물든 방』은 ‘여성 에드거 앨런 포’ ‘영문학의 마녀’로 불리는 영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앤절라 카터의 대표작으로, 「푸른 수염」 「미녀와 야수」 「백설 공주」 「장화 신은 고양이」 「빨간 망토」 등 널리 알려진 동화에 담긴 남성 중심적 시각을 비판하며 기묘하고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동화를 새롭게 구성한 소설집이다. 카터는 이 작품을 통해 고전 동화에서 보편적 가치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사실은 부당한 세상에 순응하도록 만들려는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한다. 이 책은 출간 당시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배경 묘사와 극적인 전개가 뛰어난 걸작’이라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으며, 흔히 하위 문학 장르로 여겨지는 로맨스, 포르노, 범죄소설, 고딕소설, 공상과학소설 등에서 쓰이는 상투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낡은 이야기들을 세련된 신화로 바꾸어낸 작품이다. “낡은 부대에 담은 새 술” : 카터식 글쓰기 카터의 작품은 수많은 인유와 암시를 통해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동안 신성시되었던 모든 제도를 뒤흔든다. _레베카 먼포드(문학평론가) “낡은 부대에 담은 새 술”은 카터의 소설 기법을 한 마디로 압축하는 말이다. 동화나 민담 등 대중에게 친숙한 형식, 즉 ‘낡은 부대’에 그것을 찢어내는 에너지를 가진 새로운 이야기 ‘새 술’을 붓는 것이 카터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카터 문학 연구가 로나 세이지는 “카터는 흔히 문학에서 하위 장르로 여겨지는 로맨스, 탐정소설, 포르노, 범죄소설, 고딕소설, 공상과학소설 등에서 쓰이는 조야하고 상투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낡은 이야기들을 세련된 신화로 바꾸어놓았다”고 평했다. 특히 고전동화에 대한 카터의 개작들은 대부분 원작과 훌륭한 구성적 병치를 이루지만, 카터는 등장인물과 주변 요소들을 원작보다 훨씬 더 세밀하고 풍부하게 표현한다. 또한 다양한 장르의 특성을 혼합하여 그녀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카터의 글쓰기는 후배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카터식 글쓰기’란 신조어가 생기고 영국 대학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현대 작가로 꼽히는 등 평단과 언론에 신화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살만 루슈디는 그녀를 가리켜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라고 평하며, 카터의 동시대 작가들은 모두 그녀에게 조금씩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1992년 52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생을 마감한 대담하고도 도발적인 작가 앤절라 카터는 가장 폭넓게 연구되는 20세기의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금지된 방의 문을 여는 여자들 『피로 물든 방』의 문학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서양 사회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널리 알려진 옛 이야기나 동화들을 현대판으로 개작했다는 점이다. 개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동안 독자들에게 친숙한 동화들의 내용은 현대적 이슈로 바뀌었고, 카터의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인해 매우 다른 이야기로 변모되었다. 『피로 물든 방』의 표제작이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피로 물든 방」은 가난하고 순진한 어린 피아니스트 소녀가 돈에 이끌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연쇄살인마 후작과 결혼했다가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소녀의 시점에서 회고조로 서술된다. 이 소설의 모티프인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은 남성과 여성에 부과된 당대의 가치와 도덕률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여주인공의 호기심을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즉 남편의 범죄행위가 아니라 남편에게 불복종하고 금지된 방에 들어간 여성의 위반행위에 더 주목한 것이다. 특히 여성의 호기심은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지 못한 불순종의 전형으로 이해되어 여주인공은 오히려 끔찍한 범죄를 유발한 존재로 비난받았다. 그러나 카터의 「피로 물든 방」에는 수세기에 걸쳐 구전된 '푸른 수염'의 이야기에 실려 있었던 도덕률의 문제―여성의 호기심을 책망하거나 아내의 일탈에 대해 경고하는 등―는 제기되지 않는다. 오히려 순진한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열일곱 살 소녀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피로 물든 방」은 고립된 성, 순진한 방문객, 공포로 가득 찬 미스터리, 가학성 변태성욕에 기초한 생생한 포르노그래피의 이미지 등 고딕소설의 기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자극적인 묘사 방식으로 인해 카터는 여러 비평가들에게 ‘포르노그래피 작가’‘후기 포르노의 최고 여제’ 등 극단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하위 장르적 요소, 즉 지나치게 생생하게 묘사된 가학-피학 요소나 포르노그래피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은 카터가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자 모든 권위에 대항하려는 그녀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피로 물든 방」 외에도 이 책에는 시대와 문화를 바꾸어 고전동화의 플롯을 재구성한 아홉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미녀와 야수’는 「리용 씨의 구혼」 「타이거의 신부」, ‘장화 신은 고양이’는 「장화 신은 괭이」, ‘백설 공주’는 「눈의 아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사랑의 집에 사는 귀부인」, ‘빨간 망토’는 「늑대인간」 「늑대 친구들」 「늑대-앨리스」로 재탄생했다. 늑대에게 묘한 미소를 던지는 빨간 망토, 유부녀를 유혹하는 주인을 돕는 장화 신은 괭이, 변태 성욕자인 남편의 덫에 걸렸음을 직감하는 푸른 수염의 아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동화의 주인공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강렬하고도 섬뜩한 색감과 이미지는 책을 덮은 후에도 짙은 잔상을 오래도록 남긴다. 현실을 온통 뒤흔들어놓는 이 마법과도 같은 작품은 문학계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지닌 앤절라 카터의 독창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카터는 이 단편집에서 페미니즘을 중심 주제로 삼았으며, 사회의 전통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와 전복의 문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모든 의미와 해석을 떠나 『피로 물든 방』의 감각적이고 유희적인 문체와 문학적 깊이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