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곡만큼은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잘 치고 싶다.”
좋아하는 것을 어디까지 좋아할 수 있는지
UHD급 해상도로 펼쳐지는 피아노를 향한 진심
저자는 뭐든 한번 빠지면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는 사람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만나 전공도, 직장도 내던지고 사회과학 작가로 변신하더니, 대형마트에서 엉겁결에 들고 온 와인 한 병에 와인교 사도가 되어 “와인 간증서”까지 출간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 들고 온 “진심”은 다름 아닌 피아노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이 출장길에 ‘혼밥’을 하며 다채로운 미식 여행을 떠나듯, 저자는 “고독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방구석에 앉은 채로 총천연색 시간 여행을 떠난다. 아마추어만이 볼 수 있고 겪게 되는 생생한 경험이 UHD급 해상도로 펼쳐진다.
특유의 유머와 생활밀착형 글쓰기는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하지만 피아노를 향한 저자의 진심은 ‘취미’ 정도로 호락호락하게 넘겨짚기에는 그 깊이가 만만치 않다.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만만히 대하기 쉬운 <엘리제를 위하여>를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 여러 판본의 악보들을 늘어놓고 음 하나와 씨름하는가 하면, 작곡가가 악보에 숨겨놓은 의도를 탐정보다 더한 집요함으로 추적하기도 한다. 피아노에 관해서라면 이웃나라 소식에도 귀가 번쩍 뜨인다. 평생 클래식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일본의 어부가 독학으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완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번역기까지 동원해 자세한 전후 사정을 조사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곡을 최상의 조건에서 연주했을 때 음색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독일 함부르크산 274센티미터 풀사이즈 스타인웨이를 물색해 기어이 직접 연주해보는 에피소드는 가히 진심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동류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보이는 사람이야말로
내가 교류하고 싶은 사람이다.”
갖은 핍박과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이 땅의 고독한 방구석 피아니스트들을 위하여!
가볍게 즐기는 수준을 넘어 취미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기량을 갈고 닦는 사람이 많아졌다. 악기를 연주하는 직장인 동호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피아노는 클래식 악기 중에서는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아서인지 성인 아마추어가 가장 많은 대중적인 악기이다. 피아노 관련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콩쿠르도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늘었다. 2022년 스타인웨이에서 개최한 아마추어 콩쿠르는 수백 명의 참가자가 몰릴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체 피아노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수많은 아마추어들이 이토록 진심을 쏟아붓는 것일까. 저자는 본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연습하여 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성취감을 꼽는다.
“좋아하는 곡을 자신의 손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될 때만이 만끽할 수 있는 성취감과 고양감, 어느덧 그것을 아는 몸이 되어 버렸다. 오늘도 아픈 팔 달래고 주물러 가며 건반 앞에 앉는 이유다.”
남들 우위에 서기 위해 분투하는 대신 오직 “과거의 나”로부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데서 만족감을 느끼는 이들, 땡전 한 푼 안 나오는 일에 헛심 쓴다며 고개를 흔드는 대신 비슷한 고민과 모색 과정을 떠올리며 미소를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교류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저자는 고백한다. 갖은 핍박(가족의 짜증)과 열악한 환경(오래된 장비)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도 방구석 취미의 극한을 추구하는 “동류”들 말이다.
개인 레슨 경험을 기록한 ‘레슨 일기’에서
작가가 추천하는 연주 영상 QR 목록까지
특별한 암보 비법이 있을까? 내 연주에 감정을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페달을 귀로 밟는 경지가 아마추어에게도 가능할까? 독창적인 해석이라는 건 작곡가의 고유 영역을 침해하는 일 아닐까? 꽤 진지하게 피아노를 치는 아마추어들이라면 한 번쯤 가져보았을 궁금증들을 직접 부딪쳐가며 얻은 깨달음과 정보들로 알차게 담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피아노를 못 견디게 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라면 책을 읽는 동안 수도 없이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힘 빼기 기술을 극적으로 터득한 순간, 악보 곳곳에 숨겨진 ‘모티브’를 보물찾기하듯 발견해가는 과정, 당장 들어보고 싶을 정도로 맛깔스럽게 소개된 피아노곡에 관한 설명을 보노라면 절로 두 손이 근질근질해지고 엉덩이가 들썩인다.
피아노에 대한 진심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별도로 꾸린 두 편의 <레슨 일기>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에게 더없이 유용한 내용이 될 것이다. 더불어 본문에 등장하는 피아노곡들뿐만 아니라, 저자가 추천하는 연주 영상들을 추려 QR 목록으로 만들었다. 활자만으로 온전히 전하기 어려운 음악의 감동을 고막의 진동으로 함께 느끼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