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우리를 사물로 만드는 힘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가 서양 역사에서 힘의 무정한 작용을 최초로 밝힌 『일리아스』 눈앞에 다가온 2차 대전에 직면해 이 위대한 작품을 다시 읽다 ❖ 시몬 베유의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첫 번역 ❖ 유럽 대륙에 불길한 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1938년경 시몬 베유는 한 편의 글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그는 뜻밖의 부상으로 같은 해 귀국한 이후 자신이 속했던 부대원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또 몇 차례 신비 체험을 통해 “그 어떤 인간 존재보다도 더 밀접하고 더 확실하고 더 현실적인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기도 했다. 끊임없이 사고하고 쓰고자 한 지적 노동자이자 1909년에 태어나 생애 내내 전쟁의 파괴적 힘을 우려했던 베유는 이 시기에도 많은 글을 썼고 그중 다수는 전쟁을 테마로 삼고 있다. 아울러 그는 한층 내적인 문제에도 귀를 기울이며 동서양의 종교, 특히 신비주의 문헌을 샅샅이 살피며 사색했다. 이런 와중에 집필한 이 글은 당시 베유의 문헌 중 드물게도 급박한 정세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서사시 한 편을 다룬다. 시몬 베유의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논고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가 바로 그 글이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서 베유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이 서사시의 진짜 주인공이자 중심 주제는 위대한 영웅들이 아니라 ‘힘’이다. 인간이 힘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힘이 인간을 소유하며, 힘에 복속된 우리는 영혼을 가진 사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일리아스』는 이런 힘의 작용을 숨김없이 그리고 공평하게 드러낸 서구 최초의 작품일 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도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거울”로 남아 있다. 나아가 베유에게 이 시는 여러 형태의 순수한 사랑을 그림으로써 사람들이 힘의 포획에서 벗어나 영혼을 지니게 되는 “그 짧고 신적인 순간”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리시올 출판사는 이제까지 국내에 번역된 적 없는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를 처음 번역 출간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번역된 바 없는 베유의 미완성 원고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를 함께 수록했다. 중력과 은총의 대립으로 잘 알려진 베유의 사고 체계는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서 힘과 거기서 빠져나오는 은총의 대립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에서 이 대립은 베유가 마르크스주의 사고의 약점으로 지적하는 필연성과 초자연적인 것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두 글은 『일리아스』와 마르크스라는 상이한 대상을 다루지만 힘과 필연성, 전쟁, 은총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동일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오랫동안 지배의 메커니즘과 내면성의 형식에 천착했고 최근에는 마음과 영혼의 문제에 몰두해 온 연구자이자 시몬 베유의 독자인 이종영이 번역을 맡았다. 이 두 편의 글을 수록한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힘, 불행, 선, 은총, 영혼, 노동 철학 등 자신이 전념해 온 지적이고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시몬 베유의 사고를 유감없이 드러내 준다. 한편 이 책은 다른 출판사들과의 협력하에 『중력과 은총』(윤진 옮김, 개정판, 문학과지성사) 및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이종영 옮김, 새물결)과 공동으로 출간된다. 이 세 권의 출간을 계기로 한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시몬 베유의 철학적・신학적 면모를 한층 깊이 있게 검토하고 그가 던진 질문들을 다시 숙고할 기회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시몬 베유는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실천가인 동시에 수수께끼 같은 성격과 신념의 소유자기도 했다. 그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동화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교의 신을 믿으며 죽었고, 고등사범학교 출신이었지만 노동 현장에 투신하고자 했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평화주의자였고, 신비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 세례 받기를 거부한 그리스도교인, 자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누구보다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렇기에 그의 성찰은 삶의 궤적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베유의 생애를 독자들에게 간명하게 전달하고자 옮긴이 이종영이 작성한 ‘시몬 베유 연보’를 말미에 수록했다. 전쟁과 힘의 처참함을 비추는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거울” 『일리아스』를 힘의 서사시로 다시 읽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시몬 베유가 『남부 평론』 1940년 12월호와 1941년 1월호에 에밀 노비스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글이다. 그가 언제 이 글을 집필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고, 1938년이나 1939년의 어떤 시점에 썼다고 알려져 있다. 『일리아스』는 베유가 오래도록 사랑하고 자주 인용한 책이다. 일례로 1941년 마르세유에서 체포 위험에 직면한 베유는 옷가지와 한 권의 책만 챙겨 도망쳤는데 그 책이 『일리아스』였다. 또 그는 「일리아스 또는 힘에 시」에 인용한 『일리아스』 구절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이 서사시를 향한 사랑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마도 학창 시절 스승인 알랭일 것이다. 알랭은 『일리아스』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은 필연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람이 필연성을 넘어설 가능성은 전혀 없다.” “여기서 그 어떤 시인도 직접적으로 숙고하지 못했던 전쟁의 실재를 만날 수 있다.” “힘은 모든 걸 떠받치고 있다. 힘은 판단한다.” 또 1938년 무렵엔 프랑스 지식인 사이에서 힘이 빈번한 테마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베유는 힘에 초점을 맞춰 『일리아스』를 읽는다. 그에 따르면 힘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의 영혼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늘날까지도 힘의, 나아가 전쟁의 비밀이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임박한 전쟁의 암운 속에서 쓰인 힘에 대한 글, 전쟁에 대한 글이다. 베유는 원래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1939년에 독일군이 프라하를 침공하자 평화주의를 포기한다. 그렇지만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전투적인 글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반전주의적인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베유는 『일리아스』를 읽으며 전쟁을 힘의 논리로 사고한다. 그에 따르면 힘의 논리는 사람의 영혼을 종속시키며, 이렇게 힘에 종속된 사람은 사물로 전락한다. 누구든 예외 없이 자신이 가진 힘보다 더 멀리 나아가며 이로써 몰락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강자도 없고 절대적인 약자도 없으며, 힘을 행사하는 사람이건 힘에 당하는 사람이건 모두 영혼이 파괴된다. 그리하여 베유는 이렇게 말한다. “끝까지 행사되는 힘은 사람을 문자 그대로 사물로 만듭니다. 사람을 시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엔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일리아스』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시하는 광경입니다.” 베유는 힘의 논리에 입각해 『일리아스』를 읽고, 이 서사시가 전쟁의 차가운 잔혹성과 공평성을 그 어느 작품보다도 선명하고 생생하게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그는 전쟁의 잔혹성 속에 숨겨져 있는 기적과 은총을 언급하며 『일리아스』 곳곳에 이런 은총의 장면이 담겨 있음을 일깨운다. “힘만이 유일한 주인공”인 전쟁터 여기저기에 “빛나는 순간들이 흩뿌려져 있고 […] 그 짧고 신적인 순간 속에서 사람들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 베유는 그처럼 빛나는 순간의 예를 트로이아의 왕인 프리아모스에게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건네주는 아킬레우스에게서 찾는다. 적의 시체들을 조롱하고 능욕하는 전쟁터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친구를 죽인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준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가 인간 운명의 처참함에 대한 서글픔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처참함에 직면한 모든 사람의 평등성이 그들 사이에 우정을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베유는 “전쟁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은, 필생의 적들의 가슴에 생겨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