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출간되어 여행 에세이 분야 베스트셀러에도 올랐던 <도쿄적 일상>의 개정판 출간!
도쿄는 현대 대도시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쫓기듯 전철 한 귀퉁이에 끼어 밀려가는 사람들과 홀로 공원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 일을 마치면 집 근처 주점에서 혼자 맥주 한 잔을 마시고 휘청대며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 그곳은 당신이 살아내고 있는 이곳과 닮아 있다.
혼자 라면을 끓여 먹다가, 혹은 TV 속 개그 프로가 웃음이 아닌 먹먹함으로 다가올 때, 무언가 잃어버린 마음으로 서점이나 카페의 문을 열 때. 저자는 말한다, 사치라도 좋으니, 도쿄로 가라고. 당신처럼 유약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한없이 슬프지만 무엇이 슬픈지 알 수 없고, 늘 일상뿐이면서 그리워하는 거라곤 지금과 조금 다른 일상이 전부라면 도쿄, 그곳으로 가라고.
“이것은 여행에세이인가? 여행 에세이가 아니다, 여행 인문학이다.”
- 영화평론가 박우성
여행만으로, 여행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인문학일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이뤘던 『도쿄적 일상』의 개정 증보판 출간
왜 하필 도쿄적인 일상일까?
현대 대도시를 대표하는 공간, 도쿄. 쫓기듯 전철 한 귀퉁이에 끼어 밀려가고 밀려오고, 홀로 공원에 앉아 도시락을 먹거나 퇴근 후 집 근처 주점 혼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고 휘청대며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도시. 이곳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왜 도쿄가 굳이 도쿄적이라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유유자적은 또 웬 말인가?
‘적’이라는 말은 영어 접미사 ‘tic’의 번역어로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이후 쓰였으며, 한국어로는 ‘~스럽다’로 번역된다. 하지만 국어 순화라는 단순한 처방전으로 ‘적’을 ‘~스럽다’로 바꾸면 뜻 전달이 어려워지는 단어들이 많다. 구체적, 객관적, 대략적……. ‘낭만적’이라 써야 오히려 낭만이라는 정서를 적절히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일상의 공간 서울에서 끝내 누릴 수 없었던 유유자적한 산책의 공간을 찾아 도쿄로 간다. 그곳의 일상을 관찰하며 도쿄가 되지 못한, 그렇다고 온전히 서울도 되지 못한 ‘도쿄적’인 서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원칙과 상관없이 한국어가 ‘일본어적’으로 쓰이는 게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듯, 실제 도쿄가 아닌 ‘도쿄적’인 것이 한국인의 생각 저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한국의 ‘도쿄적’인 것들이 오히려 도시의 삶을 평온히 누리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적, 역사적 잔재이자, 시대 정서와 맞지 않은 일률적인 도시 외양과 시스템, 국민총동원을 강요하던 전후 일본의 낙후된 정서를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쿄를 산책하며 저자는 서울이 도쿄적이 된 것이 쇼와시대(1926년∼1989년)의 추억을 공유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일본이 가장 일본다웠던 시절이라고 생각하는 쇼와 시대. 그리하여 드라마, 만화, 소품, 먹을거리 등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고 재창조하며 기억을 강요하는 부자 일본. 그런데 한국의 역사, 정치, 문화는 물론 아이들 놀이부터 군것질거리까지 쇼와 시대의 영향을 너무나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최근 십여 년 간의 이자카야 열풍은 서울 시내를 흡사 일본의 어느 골목을 옮겨온 것처럼 바꾸어 놓았다. 젊은이들은 반일 감정을 내세우면서도 일본의 넷우익과 닮은 정치적 보수화, 강국, 군사주의 염원을 표면화시키는 한편 그 뒤에 숨어 혐오, 차별의 정서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저자는 이런 정서 모두가 청산되지 못한 친일 쇼와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 도쿄의 쇼와 정서는 한국의 도쿄적 현실과는 매우 달랐다. 1958년의 도쿄 타워, 1964년 도쿄 올림픽, 1963년 아톰, 1966년 비틀즈 공연. 1974년 세븐일레븐의 탄생은 바야흐로 25시 시대의 개막이었다. 모두가 중산층으로 살아보자는 약동의 시대, 모든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풍요로운 생활 하나만을 바라보던 곱고 순수했던 시절. 그것은 그들에게 온전히 긍정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수와 약동이란 수식이 숨기고 있는 군국, 차별, 국민 희생의 정서는 한국으로 넘어오고 나서야 표면화되었다.
유유자적 살아간다는 건?
유유자적은 한가롭고 걱정 없는, 세상에 속박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한가롭다’의 단서는 여유가 있다는 것인데, 한가로워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유가 있어야 한가롭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여유’가 재산의 남음이라는 의미보다는 자족한다는 의미에 가깝기에 이월되는 금액이 없는 은행계좌를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자족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자족은 말 그대로 소소하더라도 스스로 만족하면 된다는 정신적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퇴근 후 동네를 산책할 여력이 있다는 것이 자족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 양 옆 빼곡하게 주차된 차량과 그 사이를 조심성 없이 지나는 운전자, 온 거리가 흡연 장소고 골목 모퉁이마다 배려 없이 버려진 쓰레기가 지뢰밭처럼 널려 있다. 동네 밖으로 눈을 돌리면 도처에 규명 안 될 죽음이 있고, 억지스런 위협과 낙인이 있다. 자족이 가능한데, 유유자적이 안 된다. 그래서 유유자적의 공간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뮌헨이어도 좋고, 오슬로여도 좋고 방콕이어도 좋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공간에서 유유자적한 마음을 탐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자신이 사는 공간, 그것을 둘러싼 환경, 무엇보다 그 하부에 관해 이야기를 찾아가다 발견한 곳이 도쿄다. 도쿄와 ‘도쿄적’인 생각거리들은 우리의 유유자적한 삶을 위해 반드시 짚어 봐야 할 과정이었다.
가볍게, 가볍지 않게
봄, 바람에 흔들려 나풀대는 꽃잎들, 꽃 아래 자리를 펴고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봄볕을 채우는 졸음 섞인 사람들의 말소리, 가벼운 웃음들. 유유자적의 행로는 봄나들이에서 시작된다. 현실은 빽빽한 지하철일지라도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한적한 오솔길을 산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생은 봄날이다. 가볍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흘러가는 봄날처럼, 저자의 가벼운 봄나들이는 가볍지 않은 과거와 지금 이 시대를 관통하며 이어진다.
여행 에세이가 아닌 여행 인문학
이 시대를 보는 저자의 시점은 10년의 치열한 산책 끝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행 매거진 브릭스를 통해 수년 간 시도해 온 여행 인문학의 결과이기도 하다. 책은 묻는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삶과 관계없는 정보들로 당신의 여행을 채우려고 하는가? 낯선 길, 낯선 사람들 속 이방인이 되는 두려움을 내색 않고 이국의 사람들과 마주앉아 유유자적 시간을 흘려보낼 용의는 없는가? 시스템이 정해준 일상에 맞춰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행은 인생의 몇 안 되는 선택지이다. 주변 사람들의 여행담과 어차피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맛집 정보에 당신의 산책과 사색의 시간은 도둑맞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결국 유유자적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 갈팡질팡 종종 걸음이나 치게 될까? 내가 나선 산책길에 출구는 있는 걸까, 없는 걸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걸을 수 있는 데까지 걸어보는 것이지만, 걸어본다고, 살아본다고, 정말 알게 되는 것일까?”
- 본문에서
흔히들 말한다. 여행은 삶의 쉼표, 휴식이며, 결국 일상으로의 안전한 회귀를 위한 일시적 낭만 또는 일탈이라고. 그러나 이러한 말은 어디까지나 돌아갈 곳이 정해진 사람에게만 한정된 말이다. 어느 건물 밖, 또는 집 밖으로 내몰리는 현실 속에서 여행은 더 이상 휴식이나 성찰이 아닌 불안한 생존의 모습으로 우리를 자꾸 찌른다. 어쩌면 여행은 일상을 통째로 내던져야만 닿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의 생존 자체가 통째로 여행길에 내던져진 것일 수도 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