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부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까지
허연을 탐독해온 시인들이 가려 뽑은 허연 시의 진경
허연 시선집 『천국은 있다』가 아침달에서 출간됐다. 본 시선집은 허연의 시를 아껴 읽어온 다섯 명의 동료 문인들이 가려 뽑은 허연의 대표작 60여 편과 허연의 근작시 12편을 담고 있다. 허연은 1991년 등단 이후 30년간 숨겨진 삶의 비의를 담은 그만의 독자적인 시를 선보여왔다. 이번 시선집은 독자들에게 허연이 그간 일궈온 시 세계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계기다. 72편의 시와 함께 수록된 오연경 평론가의 해설과 유희경 시인의 발문이 허연의 시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독자들을 안내해줄 것이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슬픔의 공화국을 향하여
허연의 시가 일관되게 그려온 정서가 있다면 상실과 쓸쓸함이다. 그의 시는 늘 쓸쓸하고 고독하다. 그러나 그 정서는 처량함이나 애정에 대한 갈구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의 화자들은 언제나 그 고독을 감내한 채, 마치 순교자처럼 홀로 세상을 대면하고 걸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시가 그토록 쓸쓸한 어조로 그려내고 있는 상실이란 어떤 것일까. 동시에 왜 그의 시에는 장맛날과도 같은 우울이 어려 있을까. 우리는 왜 매번 그의 시를 보면서 그 정서에 동의하고 또 동조되고야 마는 것일까.
오연경 문학평론가는 허연의 시 세계를 두고 “슬픔의 공화국”이라고 칭한다. 그에 따르면 허연의 시에는 우리가 미처 상실한 줄도 모르고 잊어버린, 그리운 줄도 모르고 그리워하는 세계가 있다. 그의 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폐허이자 무덤으로 잔존하는 세계를 비추어내며, 이를 통해 현실로부터 추방된 것들이 모인 그 세계로 우리들을 데려간다.
우리가 그의 시에서 우리가 흘려 보낸 지난 시절과 다시 마주하고 슬픔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미 망령이 되어버린 과거를 다시 만나는 일이 늘 아름답지는 않지만, 거기에 어려 있는 추함마저도 언제나 현실보다는 더 아름답다. 현실 속 우리는 늘 세속적인 문제들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돈, 사랑, 그리고 명예와 관련된 욕망들. 미래에 대한 고민도 대개는 밥벌이나 건강 문제 들에 한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 세월이라는 강물에 쓸려 사라지고 과거가 된다. 한편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 과거에서 남기고 싶은 순간들은 그런 문제들보다는 더 중요해 보이는, 우리가 어느 순간 놓치고 있었던 자기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들을 관조적인 자세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은 허연 시의 큰 매력이며 미덕이다. 허연의 시는 높은 곳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비루한 육신을 입고, 지상의 추함을 견뎌내며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있다. 우리가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여러 정서들―우울, 슬픔, 아름다움, 그리고 성스러운 면모에 모두 중독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세속적으로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 안에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허연의 시는 그것들에 관한 비밀스러운 고해다.
세속적인 것들을 견디는 일의 성스러움
수도원에서 도망쳤다
신을 대면하기엔
나는 단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슬픔에 슬픔을 보탰다」 부분
시선집에 함께 수록된 유희경 시인의 발문은 허연 시인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허연에 관련된 유희경 자신의 이야기를 겹쳐 재구성한다. 어두운 방에서 자라며 신부가 되려고 했던 소년이, 신부가 아닌 시인이 된 까닭이 유희경의 문장을 통해 목판화처럼 드러난다. “신을 대면하기엔” 너무 많은 단어를 알아버렸다는 그의 시에서도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유희경은 “허연의 시집은 견딤으로 가득하다”라고 말한다. 그 견딤은 누군가에게는 모면이나 포기로 오해될 수도 있는, 묵묵한 견딤이다. 그렇게 견디는 것이 우리의 생의 전부라는 듯이. 그의 시에 깃든 종교적인 면은 이러한 생의 견딤을 통해 현현한다.
그의 시를 읽은 독자들은 이러한 허연 시의 종교적인 면모가 단지 성스러움에 대한 찬미나, 허무에 가까운 관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시에는 추함이 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어야 한 시절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어둡고 쓸쓸한 풍경 속에서 존재의 추함을 길어 올리면서도 이를 아름다운 것으로 빚어내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결국 인간에 대한 염오의 한편에 또한 언제나 그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 이러한 추함은 성과 속의 사이에서 벌이는 자기 객관화의 순간이기도 하다. 자기 존재가 추하다는 아는 데에서 오는 고해의 진솔함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아슬아슬한 균형 감각이 그의 시를 살아 있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추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나의 전부가 나를 버려도 좋았다”는 확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시선집 『천국은 있다』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러한 공통 인식 가운데서 조금씩 움직이는 그의 변화다. 거기에는 시간이 있다. “사랑이 한때의 재능”이라고 말하던 「천국은 없다」에서 “계산처럼 맑고 함수처럼 평등한” 천국을 상상하는 「천국은 있다」로 흐르게 된 시간이 있다. 바닷가에 서서 파도와 아이가 노는 풍경을 바라보는 「파도는 아이를 살려둔다」와 같은 시를 낳게 된 시절이 있다. 시선집을 통해 그간 허연의 시가 이뤄왔던 것은 무엇이며, 이후로는 어떤 경지에 다다를지 예감해봐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