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순수한 사랑을 의미한다는 ‘플라토닉 러브’. 수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사랑을 꿈꾸지만, 정작 그 ‘순수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플라토닉 러브’는 과연 무엇일까? ‘플라토닉 러브’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지혜의 사랑’을 추구하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열정을 두고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누구나 소크라테스가 부르짖었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안다. 그 말이 사실은 아폴로 신전에 새겨진 경구(警句)라는 것도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안다’는 것을 정말 어느 정도까지 치열하게 추구했는지도 알고 있을까? ‘지혜의 사랑’은 과연 어느 정도나 격렬했던 것일까? 저자는 이 책, ‘플라토닉 러브’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확히 말해,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오직 상상하고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책과 같은 형태로 남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어땠는지는 플라톤의 대화편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자는 플라톤의 대화편 속에 넓게 펼쳐진 그 사상의 대양을 가로질러, 소크라테스의 삶을 꿰뚫는 ‘사랑’의 빛을 찾아 헤매는 항해를 거침없이 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 책 속에서 일반적인 철학의 경계를 과감히 넘어섰다. 그는 소크라테스 당시 그리스의 신화와 풍습과 종교와 교육과 정치와 사상의 흐름과 아테네와 그 주변 도시국가 사이의 역학 관계 등은 물론, 얼핏 보기에 철학과 별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 사이의 감정이나 수학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온갖 영역을 넘나들며 진정한 ‘소크라테스 알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 결과로 그것이 교육과 만난다는 신기함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새로운 학문적 탐구 모형으로서 자주 언급되는 ‘통섭’과 ‘융합’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플라토닉 러브’는 분명 철학과 사상을 소재로 한 책이지만, 흔히 상상할만한 따분함이나 현학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우선 소크라테스의 배경을 파악한 뒤에야 비로소 사상 부분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출발점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델포이 신탁이 내려온 이후부터다. 델포이의 신탁만큼 소크라테스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소크라테스 생애에 다시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드는 순간보다도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현자’라는 신탁의 결과는 모순이기 때문이었다. 아고라의 군상들이 저지르는 모순, 그 모순을 신도 저지르는가. 신탁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여정이 시작된다. 신탁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는 아테네에서 지혜로운 자로 소문난 정치가, 시인, 장인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사람들이 ‘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안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정치인, 철학자, 시인, 소피스트들이 ‘안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면서 논리적 모순에 찬 말들로 설쳐대던 시기였다. 그런데 저자는 분명히 그 시기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를 게 있느냐고 행간을 통해서 묻고 있었다. 이 책은 확실히 행간을 통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생각건대, 소크라테스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한 지혜였다. 그는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음을 함의한다. 소크라테스가 앎의 의미를 깨우친 그 순간은 아폴론이 내린 신탁의 비밀을 깨우치는 순간이었다.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경구 ‘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가 인간 소크라테스를 통해 풀리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걸은 그 길은 누가 뭐래도 외롭고도 아름다운 득도의 길이었다. 신의 것을 인간에게로 가져오는 데는 그만큼 외로웠겠지만, 그토록 아름답기도 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역사였다. … 그 사랑을 우리는 ‘지혜의 사랑’이라 하고, 플라톤이 사용한 말이라 하여 ‘플라토닉 러브’라고도 한다. ‘플라토닉 러브’는 더 말할 나위없는 ‘진정한 교육의 길’이었다. 오늘날의 교육과 교육학이 되돌아보아야 할 길이다. <플라토닉 러브>는 철학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학술서적은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삶 전체를 조명하지만 전기 또한 아니다. 그것은 결국 그 두 가지를 모두 합한 것이고, 그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삶 이면에 녹아있는, 그래서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 이끌었던 단순한 지식 이상의 것 ― ‘지혜의 사랑’이라고 하는 ‘플라토닉 러브’의 진정한 의미 ― 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좁게 보아 철학과 교육에 대한 입문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이라면, 뜻밖의 사건(델포이의 신탁)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고 깨달음을 얻은 뒤, 이상을 위하여 치열하게 살았던 소크라테스의 인생을 통해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정의롭지 못한 정치판과 방향을 잃고 부유하는 오늘날 우리 교육에서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진정한 현자들이라면 말이다. 곳곳에 삽입된 <사색의 방>은 단순한 보충자료가 아니라, 사물과 사건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