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세계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 영화는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영화와 철학의 만남, 그 경이적인 기록! 세계 속에 몸을 두고 있는 한 인간은 세계를 감각적으로, 주관에 의해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한편 영화를 보는 사람은 스크린 속의 세계(이미 거기에는 없는 세계, 지나가버린 세계이다)를 감각을 통해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광학적으로’ 파악한다. 그때 우리는 세계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단 그때 우리 자신은 그 세계 속에 있지 않다. 부재하는 ‘현실’을 스크린에 비추어내면서 하나의 세계를 마술적으로 출현시키는 영화라는 매체는 20세기의 역사와 사고에 결정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스탠리 카벨은 그 물리적.기술적 기반에 주목하면서 회화, 사진, 연극과는 대비되는 영화 자체의 본질을, 모더니즘의 미학비판적 시각 아래 탐구하고 있다. 영화를 생각하는 데 있어 ‘바쟁 이후’의 흐름을 이어가면서 그것의 철학적 갱신을 시도한 이 책은 현재 ‘영화철학’의 분야에서 들뢰즈의 『시네마』와 쌍벽을 이루는 책으로 꼽히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스탠리 카벨의 저작으로 국내 첫 소개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등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이 영화를 본격적인 테마로 삼아 논하고 있는 것은 이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카벨은 그러한 흐름의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들뢰즈와 함께 가장 정력적으로 영화라는 주제에 달려든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카벨의 영화론은 다루는 영역이 넓은 이 철학자의 테마 중의 하나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질적인 역할을 그 철학적 영위 전체에 걸쳐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행복의 추구』와 함께 카벨의 영화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눈에 비치는 세계』는 이미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영화론의 새로운 고전으로서의 위치가 부여되고 있다. 카벨은 사상적 기초를 자신의 경험에서 많이 끌어올리는 사람으로 그런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된 강렬함과 설득력이 그의 글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저작은 다소간에 다 자전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자신이 ‘형이상학적 자서전’이라고 밝힌 이 책도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 전형적인 책중의 하나일 것인데 자신이 걸어온 영화 체험을 통해 말하자면 영화광으로서의 철학자의 자화상을 제시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외부에서 객관적인 연구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안에 축적되고 혈육화된 기억으로서의 영화를 (그런 탓에 잘못된 기억도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내재적으로 고찰하는 본서의 입장은 카벨이 비트겐슈타인과 스승인 J. L. 오스틴에게서 계승한 철학의 기본자세와 밀접히 맺어져 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언어와 사물의 일반적인 의미라는 것은 없고 (있다고 해도 알 수가 없으며) 의미라는 것은 항상 특정의 누군가에게 있어서의 의미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며 그런고로 어떤 사물의 의미는 그 사물 자체에 대한 지식이기 이전에 거기에서 의미(의의)를 찾아낸 누군가에 대한 지식(즉 인지acknowledgement)인 것이다. “인지는 지식을 넘어선다”, 혹은 “인지야말로 지식의 본가이다(acknowledgement is the home of knowledge)”는 식으로 말해지는 것들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회의론의 움직이는 영상이다” 데카르트 이래 서양의 인식론의 역사에 있어 인간의 지식은 오로지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확실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보고 느끼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혹은 그것이 환상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또한 항상 있었다. 카벨에 따르면 영화는 이런 의심을 명료하게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진 및 영화가 그 이전의 예술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창조의 과정에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카메라가 포착한 세계의 리얼리티를 의심할 수 없게 된다. ‘세계 그 자체’가 눈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스크린 속의 세계를 감각을 통해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광학적으로’ 파악한다. 그때 우리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확신하지만 단 그때 우리 자신은 그 세계 속에 있지 않다. 여기서는 ‘세계의 외재성’이라는 인식이 문자 그대로 경험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그 자체’라는 것은 오로지 스크린 위에서 ‘보는’ 것이 가능한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리얼리티에 대해 감각적인 확실성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서만 세계의 현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실생활에 있어서는 항상 (세계는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회의론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의미에서는 영화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게 한다. “영화는 회의론의 움직이는 영상이다”는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아포리즘적인 한 구절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다름 아니다. ‘학교로서의 영화’ 스크린 위에서만 확인이 가능한 그런 ‘세계’에서는 여러 작품에서 여러 배역을 연기하는 것으로 배우 본인의 개성의 에센스만이 추출된 인물 그러니까 배우 본인에게도, 특정의 배역에도 환원되지 않는 수많은 ‘전형적 인물’ 즉 ‘스타’들이 등장한다. 이 스타들은 그 본성으로 인해 인간을 사회적 신분 등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비추어내는 영화의 카메라를 통해 실제의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관계와는 다른 순수하게 대등한 인간관계로 맺어지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들 ‘전형적 인물’의 실체는 각 작품을 통해서 카메라가 살아있는 배우에게서 뽑아낸 사진적 영상의 총계에 지나지 않지만 역으로 말하면 살아있는 인간처럼 그 배후에 아무 것도 감추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혹은 그녀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 있어 현실세계에 있어서의 동료(혹은 친구)보다 더 친밀하고 리얼한 존재가 되고 우리는 스크린 위의 그(그녀)를 ‘보는’ 것에 의해 ‘타인은 실재하고 있는 것인가’하는 실존적인 회의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들이 나누는 순수한 인간관계를 눈앞에 둠으로써 ‘타인과 관계를 맺고, 타인을 이해하고, 혹은 내가 이해를 받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하는 불안에서도 자유롭게 된다. 그리고 세계의 가치, 인간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를 마음 깊은 곳에서 실감하게 된다. 영화의 이러한 힘이 가장 유효하게 발휘된 것은 할리우드의 황금기였다. 황금기의 할리우드 영화는 세계의 축도縮圖였고 현대의 신화였다. 그것을 참조함에 의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복잡하고 불투명한 세계의 얼개를 명쾌하게 아는 것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인 지침도 얻고 있었던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인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 학교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는 것은 자주 지적되는 것이지만 세계의 스크린을 석권한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러한 영화의 힘에 의해 행복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의 영화에 대한 카벨의 진단은 놀랄 정도로 비관적이다. 이 책이 실제로 쓰여진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미국 사회의 격동과 혼란을 염두에 두면 이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당시의 미국은 한편으로는 베트남 전쟁이 점점 진창이 되어가고 공산권과의 핵개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며 공민권 운동이 갈수록 거세지는 와중에 가두에서는 데모와 폭동이 심해지며 암살이 횡행하며 결국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인의 도덕적 퇴폐가 갈때까지 갔다는 인상을 주는, 불안과 혼돈의 시대였다. 역시 70년대 초반에 발간한 『센스 오브 월든』에서 카벨이 미국적 정신의 원점인 소로우를 유럽 대륙의 대철학자들과 동렬에 놓고 그를 되살리려고 한 배경에는 이러한 미국사회의 혼미가 있다. 한편 영화계로 눈을 돌려보면 역시 격동과 혼란이 지배하고 있다. 40년대까지 거슬러서 시작된 할리우드의 조락에는 점차 박차가 가해지고 황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