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백상현 · Essay
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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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속지 않는 자들의 방황을 지지한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집요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특수한 슬픔과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방황의 여정 그리고 방황 끝에 도달하는 공동체의 각성에 관하여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벌어진 유가족들의 투쟁은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정의와 감당할 수 없는 정의의 간극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공동체의 한계를 드러냈다.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는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의 투쟁을 공동체에 출현하는 진리의 과정으로 간주하고 이를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저자는 세월호를 둘러싼 지난 3년의 투쟁이 단지 유가족들의 개별적인 투쟁이 아니라 한 사회에 진리가 출현하고 보존되는 혁명적 절차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이라는 부제가 말하듯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과 방황의 여정, 그리고 그러한 슬픔이 확산되어 도달하는 공동체의 각성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한없이 나약해 보였던 눈물 흘리는 자들의 투쟁이 어떻게 공동체의 미래를 창안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철학의 언어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_세월호의 슬픔은 어떻게 우리 모두의 슬픔이 되었는가 : 정치적 정동으로서의 슬픔에 관하여 세월호 참사 1073일 만에 세월호가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호가 인양되었지만 유가족들에 대한 정부와 일부 국민들의 냉담한 시선은 여전하고 유가족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다. 어느새 유가족들은 우리 사회에서 이념적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촛불과 태극기. 세월호 유가족들은 종북 세력으로 몰리고, 사적인 이익을 위해 슬픔을 멈추지 않는 이익 집단으로까지 매도당하고 있다. 우리는 진실이 떠오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이 책은 유가족들의 슬픔에 주목한다. 집요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슬픔. 세월호와 함께 사라져갔던 단원고의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전한 이 슬픔은 우리를 관객석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하는 특별한 슬픔이었다. 저자는 유가족들의 슬픔과 방황이 우리의 현재를 흔들고, 안정된 일상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진실한 슬픔이 우리의 삶을 물들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광장에 나서게 만들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정치적 정동으로서의 슬픔이다. 이는 또한 우리 공동체가 세월호 참사 이후 경험했던 슬픔의 특수한 정치성이다. 304명의 죽음에 대한 개별적 슬픔은 유가족들의 투쟁 속에서 ‘정의의 상실’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슬픔의 정동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슬픔은 정치적인 것이 되었다. 참사와 관련된 몇몇 주체들을 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마음을 흔들게 되었다. 그들이 상실한 것을 우리 모두가 상실한 것으로 만드는 이 슬픔은 정치학의 범주에서 진리를 지칭하는 용어인 ‘혁명’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토대의 정동이었다. 저자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눈물만큼이나 슬픔의 혁명적 차원을 선명하게 증명해낸 사태는 없었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아는 한, 세월호의 슬픔은 어떻게 혁명이 시작되고, 지속되고, 그리하여 어떻게 모두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이다.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투쟁은 2016년 11월의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근원지, 눈물의 수원이었다. _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 : 철학은 함께 슬퍼하고, 조난에 동참하고, 방황을 지지한다 이 책의 부제는 ‘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철학의 언어로 세월호를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저자는 수많은 대답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단 하나의 문장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슬퍼하기 때문이라고. 철학을 지탱하는 정동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슬픔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철학의 탄생 그 자체에 슬픔이 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부당한 죽음에 직면했던 젊은 제자 플라톤이 경험한 바로 그 슬픔, 그러한 슬픔 때문에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을 변호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서구 철학은 그렇게 진리 상실의 슬픔에 대한 기나긴 애도의 철차로서 시작되었다. 철학은 슬픔에 대처하는 특수한 절차로서 탄생한 것이다. 슬픔과 조난의 고독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철학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조난에 동참하고, 그들의 방황이 말해지고 긍정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언어를 세공해야 한다. 공동체가 철학자에게 부여하는 최소한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저자는 참사 이후 슬픔의 편력을 떠난 세월호 유가족들의 투쟁에 주목하고 진리 사건의 장소로 찾아가 증인이 되려 한다. _우리는 왜 슬픔을 멈출 수 없는가 : 위로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저자는 슬픔에 주목한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서서히 잊혀갈 즈음, 유가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남겨진 저항의 수단이 단지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었을 상기한다. 유가족들의 슬픔은 완고했고 섣부른 위로에 곁을 내주지 않았다. 슬픔이 흩어지지 않도록 눈물을 무기로 싸우고 있었다. 저자는 슬픔과 애도가 전혀 다른 절차라고 강조한다. 슬픔은 상실을 마주한 채로 고통받는 감정이라면 애도는 슬픔을 끝내기 위한 작업이다. 그런데 세월호 유가족들은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애도의 작업을 완료하기를 거부했다. 누구보다 그것을 간절히 바랄 유가족들은 어째서 애도를 완료할 수 없었을까? 누군가의 상실과 슬픔을 위로할 때 우리가 기대는 것은 고정관념의 언어이다. 상심한 주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보편적 단어와 문장들로 우리는 슬픔을 위로한다. 이것이 바로 애도의 작업이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애도가 불가능했다. 유가족들은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정부의 태도를, 그들의 권위를 수용할 수 없었다. 상처를 위로하는 말의 정당성과 보편성에 깊은 불신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주체가 섣부르게 상처의 봉합을 시도하는 사회적 담화의 권위에 대항하는 한 위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하며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애도 작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상실의 공백은 광장을 떠돌게 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떠났던 편력이 바로 이것이다.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없었던 그들은 벌어진 균열을 떠안고 우리 사회의 표층을 떠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상처를 만질 수 없었다. _“나를 만지지 말라” : 권력에 속지 않는 자들에게 방황은 숙명이다 “나를 만지지 말라.” 이 말은 죽임을 당한 며칠 뒤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 말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당대의 고정관념에 의하여 해석되기를 원치 않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섣부른 애도를 거부함으로써 슬픔을 보존할 것을 이 문장 하나로 요구했던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이 세월호 참사 이후 벌어졌던 투쟁을 환기한다고 말한다. 한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상처가 출현하고 그러한 상처를 섣부르게 봉합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주체들의 투쟁은 가장 전형적인 진리 출현의 패러다임이다. 세월호 참사는 정부의 무능과 부도덕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우리 공동체의 한계점을 드러냈고, 우리 사회를 실제로 지배하는 정의와 우리가 상상하던 공동체의 정의가 서로 얼마나 다른 모습이었는가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진실을 드러냈다. 그래서 정부는 세월호를 동정하고 함께 슬퍼하는 모든 표현들에 전방위적 억압을 실행하고 은폐하려 했으며, 이는 세월호의 상처가 봉합되지 않는다면 권력의 토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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