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해석을 통해 하이데거와는
다른 ‘존재’론의 길을 열고 라캉과는 다른 진리의 주체를 찾아내야
새로운 실천의 길이 열린다!
“모든 주체는 언어가 실패하고 이념이 중단되는 지점에서 있는 힘을 다해 통과한다 ”― 본문 <성찰 35<에서
“주체란 진리의 사건에 대한 능동적 충실성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주체는 진리의 투사임을 의미한다. …… 진리의 투사는 인류 전체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적 투사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창조자, 새로운 이론적 장을 여는 과학자 그리고 세계가 마법에 걸린 연인이기도 하다.”― 본문 서론에서
놀라운 주장과 예상 외의 선언들로 21세기의 사유를 위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들뢰즈 이후의 가장 중요한 철학서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와 주체와 진리의 죽음을 선언했다면 들뢰즈는 주체와 진리의 탈주 또는 노마디즘이라는 대안적 역사를 제시했지만 아무튼 그것이 체제 밖에서의 대안의 모색이었다는 점에서 과연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근본적 단절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바로 여기에 바디우의 독창적 면모와 위대한 철학적 사유의 힘이 갖는 위치가 있다. 아마 지난 20년 동안 서구 철학의 여러 유행에 맞서 주체와 진리 등 철학 본연의 주제를 가장 견결하게 옹호하는 동시에 그것을 가장 혁명적인 방식으로 혁신시킨 사상가 바디우가 최근에 들어와 전 세계적 주목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즉 바디우는 철학에 대한 가장 철저한 옹호는 동시에 철학에 대한 가장 철저한 혁신임을 이 주저를 통해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철학의 소명을 새롭게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포퍼부터 ‘전체주의의 원흉’으로 일찌감치 지탄의 대상이 되어 왔으나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플라톤주의자’인 바디우에 따르면 그것은 철저한 오독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와 감각적인 것은 전혀 다른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것은 바디우가 보수주의자이기는커녕 라캉과 함께 우리 시대의 가장 혁신적인 플라톤 해석자임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이 책의 가장 깜짝 놀랄 만한 다른 주장에서도 계속된다. 즉 바디우에 따르면 19세기 이후 존재론을 핵심으로 하는 철학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혁명은 칸토어의 집합론의 창안으로, 그것은 미국의 수학자인 코헨의 작업에서 완결되었다. 이처럼 이 책은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혁신적인 선언과 과감한 이론적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철학은 진리의 탄생과는 무관하며 진리는 오직 사랑, 예술, 정치와 과학에서만 일어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우리는 금방 진리에 대한 위와 같은 주장이 하이데거를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를 겨냥하는 이 책의 <성찰 11>은 ‘시냐 수학소냐’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시를 통해 존재의 구원을 찾는 하이데거에 맞서 바디우는 수학소를 통해 전혀 다른 존재론을 구축하려고 한다. 물론 이는 단순히 철학 내부의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서구의 모든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난국’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좌파의 경우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존재와 사건’이 모두 일당독재나 우상 숭배 등으로 훼절되는 것과 관련된 실천적 문제이다. 바디우의 책을 읽는 매력은 이처럼 한편으로는 2,000여 년에 걸친 서구 철학사 전체의 온갖 우여곡절과 난국 , 그에 대한 하이데거의 돌파 노력 그리고 좌파의 온갖 시도들의 실패를 하나의 틀 속에서 놓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논리정연하게 읽어볼 수 있도록 해주는 데 있다. 데카르트의 주저를 따라 ‘성찰’이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이처럼 수많은 주제에 대해 ‘명석판명한’ 사유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이제 모든 철학도들, 심지어 무한한 신을 고민하는 신학도, 말라르메와 횔덜린에 대한 매혹적인 비평에 매료될 것이 틀림없을 문학도 등 우리 시대의 모든 이에게 사유의 놀라운 힘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21세기의 우리의 사랑, 우리의 예술, 우리의 정치, 우리의 과학을 새로운 사유의 틀에 담을 새 푸대가 제시되다.
‘새 술은 새 푸대에!’ 지난 1990년대의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들뢰즈의 노마디즘으로 9-11과 미국의 금융 위기 이후의 세상이 해석될 수 없음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징후로 보아 ‘몰락’하고도 남을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가장 강력한 신화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듯한 역설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즉 자본을 둘러싸고 금융 위기와 전쟁 등 무수한 ‘사건’이 벌어지지만 그것은 정작 자본주의의 본질에는 거의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며, 우리의 ‘존재’는 나날이 누추해져 가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둘러싸고 제시되는 해석은 모두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이상한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아니 사회주의라는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공장이 된 이 역설적 상황 앞에 모든 이론은 힘을 잃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철학은 어느 때보다 더 철저한 혁신을 요구받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철학은 ‘좌파’라는 등록상표와 좌파적 언사에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이 지점에서 바디우의 문제의식, 즉 우리 시대의 실천 철학은 하이데거와 라캉을 넘어서서 구축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각성하게 해준다.
그리고 라캉과 하이데거가 모두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언어적 전회’와 달리 이 책에서 바디우가 ‘수학적 전회’를 시도하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자/다수/무한이라는 기본적인 철학소를 언어학의 틀에 넣었을 때와 수학의 집합론에 넣었을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포모스트모더니즘에서 그렇게 많이 이야기된 ‘타자’와 관련해서도 집합론의 ‘속함’과 ‘포함’이라는 틀에 놓고 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윤리적 요청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본서는 철학과 문학 등의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새로운 사유의 틀을 찾지 못하고 공회전을 거듭하는 우리 지성계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특히 언어와 예술에 대한 바디우의 새로운 해석은 그의 사유의 ‘광폭’한 범위와 함께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도 새로운 철학적 영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