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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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 시 서늘함으로 새봄을 부르는 삶의 역설 절실한 언어로 특유의 서정을 노래하며 문단과 독자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아온 시인 천양희의 새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가 출간되었다. 올해로 등단 52년을 맞은 시인은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며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천양희는 현실적 절박성에서 비롯한 고통과 외로움이라는 화두를 절제된 시적 언어로 적어내며 고귀한 삶을 향한 간곡한 열망을 구체화해왔다. 일찍이 시인 김사인은 천양희의 시에 대해서 ‘여림’과 ‘낭만성’ ‘소녀 감성’ 등으로 해석하려는 시각을 경계하며 그의 시가 “온실의 화초나 마네킹으로 대변될 수 있을 아름다움과는 구별되는 혹독함을 담고” 있고 “그 혹독함을 그의 시어군들이 파열을 일으키지 않은 채 감당해내고 있는 것이야말로 천양희의 강인함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평했다. 일상어로 담담하게 적힌 시편들에는 시인의 부끄러움과 자책,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 비애와 연민 등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어떤 것도 지나치게 격발되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되는 포용력과 균형감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천양희 시는 중기로 접어들며 점차 삶과 사람과 자연을 잇는 깊은 통찰이 두드러지는 동시에, 시를 향한 굳은 의지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시집에는 사물들이 서로 겯고틀며 함께 서는 자연의 이치를 발견.체화하며 이 동력으로 절망을 통과해 시로 나아가고자 노력해온 시인의 힘찬 여정을 담은 61편이 묶였다. 사물의 원에너지를 깨우는 말맛의 진수 전주에 간다는 것이 진주에 내렸다 독백을 한다는 것이 고백을 했다 너를 배반하는 건 바로 너다 너라는 정거장에 나를 부린다 - 「저녁의 정거장」 부분 위에서 보듯 천양희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외형적 특징은 고전적 형식미다. 시어를 반복하고 중첩하거나 동음이의어 및 유사어를 써서 말맛을 높인다.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시인 김명인은 이러한 말놀음pun이 유희를 넘어서 “고통과 갈등을 여과시켜, 성찰의 순도를 높여가려는 시인의 의도가 비로소 구체화”된 결과임을 지적한다. 모든 시작들은 나아감으로 되돌릴 수 없고 되풀이는 시작(詩作)의 적이므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 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 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라는 걸 알게 된다 내면에서 신비롭게 걸어 나온 말맛들! 말의 맛으로 쓸 수 없는 것을 위해 쓴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혼자 걸을 때 발걸음이 더 확실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 시작법(詩作法)」 부분 위의 시에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임을 꿰뚫은 시인의 시작법에서도 사물의 원에너지를 흔드는 언어충동으로서의 펀의 원리를 엿볼 수 있다. “내면에서 신비롭게 걸어 나온 말맛들”로 “쓸 수 없는 것을 쓴다”는 시인의 말처럼, 안팎이 겹쳐지되 서로를 밀쳐내는 경계가 뚜렷한 펀의 발견은 시인으로 하여금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감춰진 실체에 몰입하도록 한다. 명암(明暗)과 희비(喜非)의 불가분성을 깨닫는 희수(喜壽)의 시 여행자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 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 나는 골똘해졌네 - 「생각이 달라졌다」 부분 초기 천양희 시에서 한층 더 도드라졌던 젊은 날의 비애가 점차 더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언어에 감싸여 삶의 깨달음으로 진화해온 비결을 위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막막한 허방을 허우적거리며 고통과 자책으로 웅크렸던 나날들을 견디며 뼈에 새기는 각성을 시에 덧붙여온 천양희 시인만이 다다를 수 있는 삶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제단에 불을 켜는 것은 사제가 아니라 어둠이다”(『시의 숲을 거닐다』, 2006)라고 말한 바 있는 시인은 생의 긴 터널을 통과해가며 시를 향해 나아가는 꾸준한 여행자다. 희수의 나이에 이르러 시인이 도달한 시적 경지는 그의 삶이 깊어진 정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이 시집으로 “절망하고 부정하고 수긍하며 엎질러버리는 세월일지라도 피고 지는 꽃떨기로 난만한 봄은 어김없이 찾아”(김명인)온다는 말을 조심스럽고도 분명하게 전해온다. * 시인은 욕망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시라는 욕망에 헌신하는 사람이다. 지극한 시를 소망하는 시인이야말로 실로 가난한 포용과 긍정에 드는 장본인인 까닭이다. 그에게는 순탄한 물보다 자신을 결딴낸 뒤에 오는 폭포가 ‘절창’이다. 절망을 살았기에 저절로 비장해지는 시, 삶과 시가 분간되지 않는 시인에게 시의 진실이란 허투루 살거나 쓰지 않겠다는 결심이며, 그 밖의 집은 짓지 않겠다는 각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