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다사다난한 인류의 역사처럼
다채롭고 대담한 컬러, 빨강
빨강은 색의 원형이며, 인간이 처음으로 제어하고 만들었으며 재생산했던 색이다. 그런 까닭에 지난 수천 년 동안 빨강은 다른 모든 색에 대해 우위성을 갖고 있었다.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주거 공간을 비롯하여 가구류와 집기, 직물과 의복, 그밖에도 장신구와 보석에 이르기까지 빨강은 일찍부터 그 위상이 높았다. 각종 공연이나 제의에서도 빨강은 권력과 신성함과 연관되었고, 매우 풍요로운 상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빨강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원초의 색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우월한 색이었다.
그렇지만 빨강의 역사가 항상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다. 중세 말에 최고의 색, 탁월한 색이라는 빨강의 위상은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다음 세기에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으로 급부상한 파랑과 여러 분야에서 경쟁을 벌여야 했고, 궁정 사회 의복에서 사치와 우아함을 표상하는 검정의 공세와도 맞서야 했다. 그러나 빨강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당시의 사치 단속령과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의해 전파된 색에 대한 새로운 윤리에 있었다. 새로운 윤리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빨강은 지나치게 눈에 잘 띄는 데다 값이 너무 비싸고 정숙하지 못하며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색이었다. 그 결과 16세기 말부터 빨강은 퇴조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얼마 후 과학까지 나서서 빨강의 퇴조라는 현상을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만들어 버린다. 1666년 뉴턴이 색의 스펙트럼을 발견하면서 고대와 중세 때의 인식과 달리 빨강이 색의 한가운데가 아닌 한쪽 끝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색의 여왕 빨강에게는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 자리였다.
그렇다면 색의 황금기로 불리던 18세기에는 어땠을까? 당시에는 색소 물질에 관한 화학적 연구가 전례 없는 발전을 하면서 염료와 직물의 생산이 크게 늘었고, 사람들은 색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새로운 유행이 빨강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파랑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빨강과 대립되는 색으로 여겨졌던 파랑이 이 시기에 비로소 유럽인이 선호하는 색이 되었던 것 같다.
코카콜라, 산타클로스, 마릴린 먼로…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사용되는 빨강
이제는 더 이상 선호하는 색이 아니고, 일상적인 환경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여러 분야에서 파랑에, 심지어 녹색에까지 추월당하고 있으면서도, 빨강은 여전히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들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첫 번째로 빨강은 경고와 규정, 금지의 역할을 한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빨간색 천과 빨강 표시로 위험을 알린다. 소방차, 소화기를 비롯한 화재 진압용 기구들은 전 세계 공통적으로 빨간색이며, 유사시에 신속하게 찾아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분쟁 지역에서 국제 적십자사의 빨간색 표장은 군사적인 공격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언어에서도 빨강이라는 단어로 위험 또는 금지를 나타내는 수많은 표현들이 생겨났다. 비상사태는 ‘적색경보’, 통행을 금지 및 제한하는 구역을 ‘레드 존’,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적자’로 표시하는 식이다. 두 번째로 빨강은 처벌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시험 답안지를 빨간색 펜으로 수정하는 경우부터 범죄자들에게 빨간색 낙인을 찍었던 관습에 이르기까지 그 사례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빨강이 늘 불안하게 하거나 위험한 것만은 아니다. 빨강은 긍정적 의미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당길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가격은 세일이나 행사 상품임을 나타내고, ‘레드 라벨’은 품질 보증 표시로서 일반 품목보다 상위 품목임을 알려준다. 광고에서도 빨강은 강조하거나 돋보이게 하고 시선을 사로잡으며, 심지어 고객들을 유혹할 목적으로 사용된다. 실제로 붉은색의 여성 속옷이나 빨간 립스틱이 남성들의 시선을 더 많이 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빨강이 예우를 받는 축하 혹은 기념행사들도 특기할 만하다. 공연을 시작할 때, 빨강 커튼이 위로 올라가거나 양옆으로 벌어지면서 극적으로 무대를 드러내는 의례적인 절차가 그렇다. 오늘날의 연극이나 오페라 공연에서는 여전히 빨강의 장중함이 남아 있다. 임명식이나 개막식 행사에서 ‘붉은색 리본’을 자르는 것, 중요한 인물들을 위해 ‘레드 카펫’을 펼치는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옛 시대의 장엄한 빨강은 오늘날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빨강의 반대색이 녹색이라고?
신호등에 숨겨진 흥미로운 이야기
도로 교통신호는 18세기에 탄생한 해양 교통신호와 1840년 이후 통용된 철도 교통신호에서 유래했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가 있는데, 수평적 신호(노면 표지), 수직적 신호(도로 표지판), 그리고 빛에 의한 신호(신호등, 점멸 장치)다. 세 가지 경우 모두 각각의 색에 함축된 의미는 동일하다. 여기에는 빨강, 파랑, 노랑, 녹색, 하양, 검정이 사용되는데, 이 색들은 유럽에서 중세 이래로 사용된 거의 모든 색 체계의 기본색이다.
그렇다면 통행을 규제하기 위한 색으로 빨강과 녹색이라는 두 가지 색이 선택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물론 빨강은 고대부터 위험과 금지의 색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녹색은 허용 또는 통행 허가라는 개념과 무관했다. 오히려 무질서, 위반 등 규율이나 기존 체계에 적대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색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했을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녹색은 빨강과 반대되는 색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빨강의 반대색은 흰색이나 파란색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18세기 뉴턴의 발견이다. 기본색과 보색 이론이 확산되면서 색의 배열순서가 변화했고, 이때부터 기본색인 빨강은 녹색이라는 보색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두 색은 쌍을 이루게 되었으며, 빨강은 금지의 색이므로 녹색이 허용의 색이 된 것이다. 이렇게 색채 코드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수많은 나라의 도로 교통신호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