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다가온 미래, 긴축
긴축은 미국과 유럽인들에게 아주 친숙한 단어인 것과는 달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낯설다. 그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긴축을 별로 언급하지 않았고, 국가부채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대규모 토목 사업과 문화 사업에 막대한 국가 재정을 투여하면서 국가부채가 늘고 있다는 우려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덕분에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하게 벌어졌던 긴축 논쟁은 한국에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한국은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선진국 중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그러니 국가부채 문제가 진지한 논의 대상이기보다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는 정도로 밖에 인식이 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러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가 미국과 유럽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가 뚜렷해진다.
그간 국가부채는 지속적으로 늘어 올해에는 국가부채 비율이 44.8%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는데, 일본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어쩌면 급격히 늘어날 수도 있다. 일본은 국가부채 비율이 200%를 넘은 상태로 OECD 국가 중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991년만 해도 64% 수준이었다. 일본의 국가부채가 이토록 늘어난 것은 불황과 인구요인에 따른 세입 감소가 겹치면서였다. 한국은 지금 1990년대의 일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조선업을 비롯하여 한국 수출의 주력 산업들이 흔들리고 있고, 무역은 2년 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부동산을 중심으로 키워놓은 경기도 한계에 다다랐다. 더욱이 주택담보대출 중심의 가계부채가 엄청난 상황이라 부동산 경기에 따라 언제든지 은행 위기나 대규모 불황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다.
커다란 정치 스캔들로 이런 문제들이 수면 아래 가라앉은 상황이지만, 현재의 문제들이 조금씩 가시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재정정책과 국가부채 문제를 논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더욱이 올해 말, 미 연준은 금리 인상을 거의 확실시 하고 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는 상황에서 한국이 금리를 낮추면 해외 자본이 급격이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아서 국가부채를 늘리지 않고 경제 문제들을 풀어가기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때가 되었을 때, 긴축이 부각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40%의 국가부채 비율만으로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우려스럽다고 말할 만큼 막연하게 국가부채는 나쁘다고만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이렇듯 국가부채에 대해 막연한 도덕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긴축의 목소리가 힘을 받기 쉽고, 사태를 잘못 이해하기 쉽다. 이 책에서 드러나지만 유럽이 바로 그랬다.
유럽에서 재정 위기가 터진 나라들은 한국과 유사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이탈리아는 기존 산업들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아일랜드와 스페인은 주택담보대출과 같은 금융 상품으로 떠받쳐진 부동산과 금융 시장이 문제를 일으켰다.(본문 138~148) 이런 문제들을 배경으로 재정 위기가 터져 나왔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국가부채 비율이 높아지고, 유럽이 겪고 있는 높은 실업율과 정치적 불안정을 우리도 겪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현재 유럽의 경험을 이해하고 교훈을 얻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돕는 책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간 2008년 금융 위기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은 많았어도 그 이후를 살피는 책은 거의 없었다. 마크 블라이스의 이 책은 바로 그 부족함을 채워준다. '긴축'을 키워드 삼아 2008년 이후의 세계 정치경제의 흐름을 명쾌하고 짚음으로써 유럽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제시해주고 있다.
2008년 이후 대체 무슨 일이? ― 짧았던 케인스주의의 귀환과 긴축의 부활
금융 위기 이후 시장, 특히 금융 시장의 자유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신자유주의는 힘을 잃었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로 꼽히는 전(前) 미 연준 의장 앨런그린스펀조차 『파이낸셜타임스』에 자기반성의 칼럼을 썼을 정도였다. 그리고 케인스주의가 다시금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 세계는 정부가 대규모로 은행 구제에 나서는 것을 목도했으며, 각종 사회보장제도들을 입안하고 강화하는 것을 목격했다. '거장의 귀환'이었다.(본문 121~123, 131쪽)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반격은 독일과 유럽중앙은행에서 시작되었다. 토론토 G20 회의를 앞둔 시점에서 『파이낸셜타임스』와 같은 경제지에 유럽중앙은행장 장 클로드트리셰와 독일 재무장관 볼프강쇼이블레를 중심으로 경제부양책을 멈추고 '확장적 재정건실화'로 기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G20이 채택한 공동성명서는 '성장친화적 재정건실화'를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지출 중단을 촉구했다. 짧은 시간 사이에 케인스주의에서 긴축으로 기조가 바뀌었고, 많은 선진국 경제 관료들과 중앙은행장들이 여기에 동의한 것이다.(본문 130~134쪽)
얼마 지나지 않아 성명서를 넘어 여러 유럽 국가들에 실제로 적용되기에 이른다. 2010년, 그리스를 시작으로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국채 수익률이 치솟아 오르면서 이른바 '국가부채 위기'가 발발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0년 5월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IMF가 개입했는데, 이들은 구제금융과 차관을 제공하면서 피그스 국가들에게 공무원 임금과 연금을 비롯한 공공 지출을 대규모로 감축하는 긴축정책을 실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발맞춰 미국 의회에서도 재정적자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루미니아, 에스토니아, 불가리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레블 동맹이라 불리는 국가들에서까지 긴축정책이 시행되었다. 케인스가 가고 긴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원인을 호도하고 본질을 숨기다
긴축은 왜 이토록 빠르게 당대의 정책으로 자리 잡았을까? 저자는 이 문제를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다. 위기의 진단과 긴축을 뒷받침하는 이론이다. 유럽의 긴축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메시지는 경제정책이 선택될 때, 문제설정이 정확한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 문제에는 속임수에 가까운 호도들이 자주 끼어들어 공공의 이익보다 특정한 집단에게 이익을 몰아주거나 책임을 피해가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속지 않으려면 경제 문제에 대한 진단을 잘 살펴야 하고, 해결책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위기 때는 더더욱 그렇다. 유럽에서 긴축이 적용되는 과정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유럽에 긴축이 불어 닥친 결정적인 계기는 이른바 '피그스'라 불리는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아일랜드에서 터진 재정 위기였다. 금융 위기가 진정되고 국채 이자율의 폭등에 의한 유동성 경색으로 재정 위기가 터지자,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옹호하는 목소리에 제동이 걸렸다. 특히 유럽 재정 위기를 전했던 국내 언론들이 잘 보여주었듯이 복지 지출이 뭇매를 맞았다. 국가부채를 무절제하게 늘리는 방만한 재정 운용이 위기의 원인이었던 만큼, 이제는 건전한 재정 유지를 위해서 지출을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위기 당사자들에게는 구제금융과 차관의 조건으로 긴축정책이 부과되었다.
대다수의 언론들은 국채 수익률이 급등한 원인이 방만한 재정 운용에 때문에 늘어간 국가부채 탓이라고 보았다. 저자는 이런 진단이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의 본질을 흐리는 거대한 속임수임을 보인다. 유럽 국가들의 국가부채 규모가 늘어간 중요한 근본 원인 중 하나는 2008년 당시 흔들렸던 은행들을 구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늘어난 국가부채는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의 은행들과 투자자들은 유럽 주변부 국가 국채 매입을 멈추지 않았다. 유로화와 유럽중앙은행이 도입되면서 이 나라들의 신용등급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사실 이 나라들의 국채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막대한 규모로 레버리지를 키워서 국채를 사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