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2008년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유고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와 마지막 저술 『저항의 인문학』을 출간하며 시작한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은 “오리엔탈리즘”으로만 이해되는 사이드의 지적 유산을 포괄적으로 소개해왔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는 탁월한 예술 비평가이기도 한 사이드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으며, 『펜과 칼』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사이드의 팔레스타인 관련 저술이다. 『저항의 인문학』에서는 서구고전 비판가라는 클리셰가 아닌 고전과 인문학의 가치를 역설하는 사이드를 만나볼 수 있고, 『평행과 역설』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출신 두 지식인의 감동적인 우정을 엿볼 수 있다.
2012년 9월 『지식인의 표상』에 이어 10월에는 사이드의 지적 전기에 해당하는 대담집 『권력, 정치, 문화』가 출간될 예정이다. 기존의 사이드 자서전은 사이드가 대학에 입학하는 시점에서 끝난다. 지식인으로서의 작업은 스스로 평가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첫 책을 출간했을 시점부터 타계하기 직전까지의 29편의 인터뷰를 엮은 방대한 대담집은 사이드에 관한 쉬운 입문서이자 인간 사이드를 대면할 수 있는 전기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BBC 리스 강연: 지식인의 표상
1992년 영국의 공영방송 BBC의 유서 깊은 강연 시리즈인 리스 강연에 초청받은 에드워드 사이드는 강연주제로 “지식인의 표상”(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을 선택했다. 동구권의 붕괴와 걸프전쟁 직후 “문명의 충돌” “역사의 종말” 같은 수사가 난무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가 팽배하던 때, 많은 시청자를 확보한 강연을 통해 사이드는 최신이론이나 고담준론이 아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다. 지식인이라는 호칭이 더 이상 명예와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냉소와 비아냥을 불러일으키는 시대, 지식인의 표상을 묻는 것은 비판의 가능성을 묻는 일이었다.
사이드의 지식인론은 평생에 걸친 사이드의 활동(저술과 사회참여 모두를 아우르는)의 방법론과 실천지침에 다름 아니다. 세속성, 아마추어주의, 망명 등 그의 저술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 개념이 압축적으로 녹아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팔레스타인인으로 태어나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망명자의 삶을 살아온 사이드의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단일한 기준
사이드는 글을 여는 서문에서부터 자신이 제시하는 지식인은 결코 정파와 진영 논리에 빠져 비판적 언사만 앵무새처럼 내뱉는 인물이 아님을 강조한다.(10쪽) 사이드가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지식인의 ‘공적 참여’에 관한 ‘보편적이고 단일한 기준’이다. 따라서 사이드에게 초월적인 재능에 완벽한 도덕정신으로 무장한 극소수의 인물은 지식인의 모델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예수, 볼테르 등이 지키려는 영원한 진리와 정의 규준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돈을 받고 일하는 연구기관의 연구원, 기업에서 일하는 이들을 고결하지 못하기에 지식인이 아니라고 치부하지도 않는다. 사이드는 지식 산업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현대 세계에서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지식인으로 보는 그람시를 따르면서도, “지식인은 대중을 향해서, 그리고 대중을 위해서 하나의 메시지, 관점, 태도, 철학이나 의견을 나타내거나 구현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인적 존재”라고 덧붙인다.(25쪽)
그렇기에, 지식인의 입장은 결코 손쉬울 수 없다.
지식인은 항상 고독과 영합 사이에 서게 됩니다. (…) 지식인이란 갈등조정자나 합의도출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은 자신의 온 몸을 비판적 감각에 내거는 존재, 즉 손쉬운 공식이나 미리 만들어진 진부한 생각들 혹은 권력이나 관습이 으레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거부하는 감각에 실존을 거는 존재입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향해 거부를 적극적으로 밝히는 존재입니다.(36쪽)
익숙한 것에서 거리두기
초월성을 거부하고 세속성(worldliness)을 추구하는 사이드는 지식인 역시 민족과 국민 같은 조건에 얽매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모든 지식인은 익숙함과 편리함 때문만이 아니라 고유의 소리, 억양, 특별한 관점을 담기 위해 모국어로 글을 쓰게 마련이다. 노엄 촘스키라도 에스페란토어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42쪽) 따라서 사이드는 지식인에게 더 예민한 언어 감각을 요구한다. 무심코 쓰는 ‘우리’와 ‘그들’ 같은 대명사에도 적대의 정치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44-46쪽). 강연과 책의 제목인 “지식인의 표상”과도 맞닿아 있다. 사이드는 이를 통해 지식인의 전범과 모델을 묻는 동시에 지식인이 말하는 바, 대변하는 바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말한다.
지식인은 제대로 대변되지 못하고 잊혀지거나 무시되는 약자들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이들의 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때 자국어는 단순히 사용될 수 있도록 저편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47~48쪽)
하지만 사이드는 약자들 편 자체가 윤리와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것을 아님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억압받는 이들 속에서조차도 승리자와 패배자들이 나누어집니다. 따라서 지식인의 충성심은 집단적인 승리의 행진에 동참하는 것으로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55쪽) 익숙한 입장과 진영에서 거리두기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다.
망명자로서 지식인
권력을 거부하며 대중에게 말을 걸되, 잊기 쉬운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끊임없이 벗어나야 하는 지식인 상은 ‘망명자’이다. 사이드는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 사건 등 20세기라는 역사적 상황이 망명자 지식인이라는 유형을 만들어냈음을 언급하지만, 자신의 망명자로서의 지식인은 은유적 측면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고국을 잃고 타지 생활을 하는 실제 망명자뿐 아니라, 한 공동체 내에서 자발적으로 망명자의 위치를 점하는 지식인을 일컫는 것이다.
허물없고 친근한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느낌, 말하자면 화합과 민족적 행복이라는 함정을 피하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지식인의 망명은 쉼 없는 운동이며, 영원히 불안정한 상태의 타자가 되는 것입니다.(66쪽)
민족, 국가, 진영 논리에 안주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정주하지 못하고 유랑하는 지식인상은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유목민’이란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사이드의 ‘망명’은 그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중간적 존재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수 있기에, 망명 자체가 도덕적 지위를 결코 부여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따라 “진정한 도피”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71쪽) 따라서,
망명자적인 지식인의 역할은 관습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대담무쌍한 행위에, 변화를 표상하는 일에, 멈추지 않고 전진해 가는 일에 부응하는 것입니다.(77쪽)
아마추어로서 지식인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 자신의 전문 분야에 함몰되지 않고 독립적인 개별적인 지식인은 존재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사이드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결합해야 하며 냉소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대학이나 신문사에서 돈벌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지식인을 매도하는 것은 의미 없는 비난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워낙 부패해 있어서 모든 사람은 돈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또한 매우 무분별한 냉소에 불과합니다. 다른 한편, 이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개별 지식인을 완벽하게 이상적인 존재, 너무도 순수하고 고귀해서 어떤 물질적인 이익과 관련한 의혹도 물리쳐낼 수 있는 일종의 갑옷 입은 기사로 간주하는 것입니다.(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