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빌라도와 예수.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교차하는 ‘예수의 재판’. 절대적인 수수께끼가 베일을 벗고 한 편의 드라마로 펼쳐지다.
흔히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라고 한다. 대속(atonement redemption, 代贖)을 통한 구원, 죽어서 가는 천당. 그래서 이 편리한 구원(실상은 피 묻은 구원)의 통로를 마련해준 종교를 통해 사람들은 현세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었을 터다.(한국 기독교는 여기서 예외라기보다는 전형에 속한다 할 것이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는 늘 ‘우리를 위해 죽은 예수로부터’라는 답변이 마련되어 있다. 이 얼마나 편리하기까지 한, 값싼 교리를 지닌 종교인가. 하지만 이 믿음이 가짜라면, 혹은 절반의 반에도 못 미치는 허위라면 어쩔 텐가. 나아가 그런 따위의 통속적인 구원의 교리는 예수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또 어쩔 텐가.
제사가 아니라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 딱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기 이전에 진리의 종교이다. 신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왔다. 그렇다면 대체 이 진리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상황에 처해졌던 것일까. 예수가 이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말은 맞다. 그러나 구원은 은혜롭지만 무기력했다. 진리를 증언하려던 예수는 실패했고, 끝내는 파탄에 이르렀다. 어떤 일(사건)이 벌어졌는가. 그것이 구원이든 진리든, 예수에게 다가가고자 한다면 이 물음을 피해갈 도리가 없다.
빌라도와 예수. 지상 제국의 대리인과 하늘의 왕이 예루살렘의 총독 관저에서 마주쳤다. 예수는 진리를 증언하는 데 실패했고, 빌라도는 판결을 내리는 데 실패했다. 제국의 진리와 구원의 진리는 대화에 성공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는 채로 진위 불명 상태에 들어갔고, 이 두 사람은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로 남게 되었다. 예수의 재판. 인류 역사의 핵심적인 계기가 된 이 기이한 재판을 이해하지 않고서 예수가 말한 진리와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만남 혹은 교차는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어떤 위기의 형식, 즉 재판이라는 형식에 처해지고 파탄날 수밖에 없었을까. 그 과정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주해〉까지도 치밀하게 계산된 이 책 《빌라도와 예수》는 한 편의 웅장한 음악과도 같은 리듬을 따라 그날 빌라도의 법정에서 벌어졌던 예수의 재판을 섬세하고도 긴장감 넘치게 추적해가도록 우리를 이끈다. 저자는 예수의 재판에서 빌라도가 맡았던 역할을 출발점으로 삼아 서구사회에서(나아가 인류사에서) 법적 판단이 행해온 기능에 대해, 그리고 그 판단이 우리로 하여금 서로 쟁론하는 영원한 것과 역사적인 것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만드는 방식들에 대해 탐구한다. 호모 사케르 연작의 일환으로 쓰여진 이 텍스트는 연작 전체에서 다루어지는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시사점이 될 뿐 아니라 아감벤 사상 전체에 접근하려 할 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던 독자들에게 완벽한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예수의 편에 선 것 같은 이 질문은 실상은 비겁함의 냄새를 풍긴다. 빌라도는 ‘죽인 자’의 편에 속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두고 질문을 던질 줄 알았던 자이기도 하다. “진리가 무엇이냐?” 니체가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세련된 말이라고 일컬었던 이 질문을 예수에게 던진 자는 빌라도였다. 우리는 과연 빌라도라는 심연을 거치지 않고서 예수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기독교는 예수의 탄생(성육신이라 부르는)과 죽음의 드라마 위에 구원의 신비가 자리 잡고 있다고 고백하는 종교다. 기독교가 말하는 이 두 가지 ‘신비’ 역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는 하나의 역사적 종교가 되었다. 칼 슈미트가 말했듯, 그리스도(예수)의 탄생-성육신이 “무한한 유일성을 가진 역사적 사건”이듯이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재판은 또한 인류 역사의 핵심적인 계기를 내포한 다른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신이 인간의 몸이 되어 세상에 왔다는 사실조차 신이 사람의 아들로 법정에 세워지고 죽음에 처해지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해야 마땅할 것이다.(만일 예수가 재판에 처해지고 처형당하지야기는 신의 짝사랑이 빚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이 면 신의 사랑에서 비롯된 구원의 신비 혹은 진리는 재판의 과정이라는 형식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어째서?
진리를 증언하러 온 자가 지상의 권력자에 의해 재판을 받는다. 이 재판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라는 결말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제국의 진리와 예수가 증언하려는 진리 사이의 대립, 진리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이해 사이의 간극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가 묻는다. “나의 왕국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 예수가 답한다. 예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기어코 왕국(권력)에 대한 대화를 진리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시킨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다.” 예수는 오로지 이것을 위해서만 태어났고, 태어나야만 했던 것이다. 누군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나고 진리를 위해 죽는다. 그렇지 않고선 우리는 결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없을 것이고,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상의 왕국에서 세속의 재판과 진리에 대한 증언은 화합할 수 없다. 이 재판이 끝내 십자가상의 죽음을 부른 까닭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우리는 빌라도와 더불어 끊임없이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그러나 대화는 파탄 났고, 진리에 대한 증언 또한 실패로 끝났다. 예수가 재판정에 섰다면, 그는 자신이 증언해야 할 진리를 입증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에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실로 불가능했던 것은 증언 자체가 아니라 입증되어야 하는 진리, 다시 말해 그는 분명 왕국을 갖고 있었지만 그 왕국은 이곳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사실이었다. 그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시간 속에서 초역사적인 것, 영원한 진리의 현전을 증언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아직은 없는 왕국의 현전을 무슨 수로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미궁에 빠져버린 재판. 이 재판 속에서는 판결도 구원도 이루어질 수(종결될 수) 없었다. 빌라도는 판결하지 않았고 단지 예수의 죽음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를 넘겨주었을 뿐이다. 예수 역시 구원의 진리를 증언하는 데 실패했고(법률적 관점에선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빌라도가 한 번도 내리지 못한, 그리고 결코 내리지 못했을 판결에 굴복해야 했다. 재판(판결)과 구원은 적어도 [이 세계의] 시간들이 끝날 때까지는 서로를 배척한다. 서로를 배척하면서 또한 서로를 불러내는 법적 정의와 구원은 결코 서로 화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의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하기를 바라는 바로 그것을 오히려 우리가 심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계는 자신의 덧없음 속에 갇혀 법적 정의를 원할 뿐 구원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현세에 만족하는 자가 천국을 갈망한다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터무니없는 욕심이다.)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끊임없이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예수와 더불어 죽음에 넘겨지는 자들은 누구인가. 아감벤의 《빌라도와 예수》는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소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