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파문

신철하 · Humanities
2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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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신철하가 '사랑'을 화두로 새 책을 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하며 시적 언어의 근원으로 사유하는 수원지를 노자의 <도덕경>으로 삼는다. 나아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통일이행기의 프레임을 축으로 텍스트를 저작하는 과정에서 기획한 기본 프레임은 노자의 담론을 시적 언어로 환원할 수 있는 감수성의 함양이었다." 말을 돌려 말하면 신철하의 이번 책은 '사랑'으로 구성하려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노자, 플라톤, 테야르 드 샤르댕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홍상수, 최인훈, 이동하 등의 예술가를 읊조린다. 궁극적으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분단체제의 해체와 아나키적 마을-꼬뮌의 구축이다. 철학자들에게서 거푸집과 골격을 빌려오고 예술가들에게서 건물의 벽과 마감재를 가져오는 식이다. 하지만 그 공동체의 토대도 사랑이며, 공동체의 운영원리도 사랑이다. 여기서 핵심은 저자가 말하는 사랑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사랑이 아니라 관계를 연결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사랑 즉 에로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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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머리말에 대신하여_ 사랑의 파문?5 Ⅰ. 사랑에 관한 연역, 혹은 인문적인 것의 학 <자유의 언덕>?29 에로스, 혹은 플라톤의 지philosophia?45 도Tao와 사랑?65 인문적인 것의 학?97 Ⅱ. 이중구속과 도 자연의 정치?119 이중구속과 ‘도’?130 다시, 왜 아나키인가?144 마을공화국?153 Ⅲ. 분단체제를 넘어서 ? 사랑의 원리로서의 소국과민 엔트로피와 은유?159 생태와 정치?169 언어적 무의식?176 병영국가(주의)로부터 꼬뮌으로?190 Ⅳ. 에필로그 ? 동시대, 왜 노자인가 잠재성?197 사건?202 과정으로서의 통일시대-통일이행기?208 노자-에로스?214 미주? 221 참고문헌?229

Description

오늘날 이 땅에서 횡행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열기는 명백히 반인문(학)적이다. 직언하여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퍼포먼스, 혹은 학문 수행이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은 인문주의자, 인문에 관해 발화하는 주체들이 습득해야 할 최초의 내면이다. 인문은 언어를 통해 실현되므로 인문에 관해 궁리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문학의 정독이 거의 필수이다. 특별히 모어mother tongue에 대한 성감대의 측면에서, 문학의 도구는 언어이다. 아니 그 언어는 도구를 넘어서는 도구이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지금-여기의 언어는 자의성이 강한 잉여, 혹은 결여의 언어로 떠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언어라는 것이다. 그 언어의 정수에 아마도 시가 있을 터이다. 시적 언어란 다시 말해 인문을 인문답게 하는 최종 심급의 언어인 셈이다. 날것의 언어, 생명의 언어, 여백의 언어, 잉여의 언어, 나아가 결여의 언어를 어떻게 재구축할 수 있을까. 전환기의 사유, 사랑의 공동체! 문학평론가 신철하가 ‘사랑’을 화두로 새 책을 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하며 시적 언어의 근원으로 사유하는 수원지를 노자의『도덕경』으로 삼는다. 나아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통일이행기의 프레임을 축으로 텍스트를 저작詛嚼하는 과정에서 기획한 기본 프레임은 노자의 담론을 시적 언어로 환원할 수 있는 감수성의 함양이었다.” 말을 돌려 말하면 신철하의 이번 책은 ‘사랑’으로 구성하려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노자, 플라톤, 테야르 드 샤르댕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홍상수, 최인훈, 이동하 등의 예술가를 읊조린다. 궁극적으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분단체제의 해체와 아나키적 마을-꼬뮌의 구축이다. 철학자들에게서 거푸집과 골격을 빌려오고 예술가들에게서 건물의 벽과 마감재를 가져오는 식이다. 하지만 그 공동체의 토대도 사랑이며, 공동체의 운영원리도 사랑이다. 여기서 핵심은 저자가 말하는 사랑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사랑이 아니라 관계를 연결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사랑 즉 에로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도덕경』을 재해석하면서, 정확하게 말해 여기서 문은 여성의 생식기, 나아가 생명의 탄생을 주관하는 곡신으로 해석의 대체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특히 포태胞胎한 여성에 대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이미 도의 경지로 묘사될 수 있는데, 우리는 6장에서 이 모티브의 반복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현빈지문玄牝之門이 그것으로, 여기서 “문”은 여성의 가장 내밀한 곳, 어두컴컴하고 은밀한 곳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에로스를 여성을 키워드로 묘사하는 노자의 사랑관은 근본적으로 언어적 여성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유추까지 가능하게 한다. 맥락적 독서에서 6장은 “여성의 은밀한 문을 달리 현빈이라 한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뿌리로, 아무리 사랑하여도 늘 처음과 같다. 즉 에너지가 넘친다. 사랑 자체가 생명현상이기 때문이다”와 같이 해석 가능하다. 생명의 에너지로서의 에로스는 여기서 거의 도와 동격으로 상승한다. 그런 이해를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고 몇 가지 다른 맥락을 요구하지만, 궁극적으로 여성성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노자의 에로스가 생명현상 일반으로, 나아가 도를 실천하는 가장 주요한 덕목 중 하나로 평가될 수 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69~70쪽) 라고 말할 때 저자의 의도는 명약관화하다. 그동안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으로 해석된 『도덕경』을 철저하게 에로스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플라톤의 『향연』과 교차로 독해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생명과 에로스의 관계를 이해하는 수준은 노자의 그것과 유사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에로스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불사의 꿈을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는 생각은 노자 6장 “여성의 은밀한 문은 불사하니 이를 달리 현빈이라 한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뿌리로, 아무리 사랑하여도 늘 처음과 같다. 즉 에너지가 넘친다. 사랑 자체가 생명현상이기 때문이다”와 거의 정확하게 겹친다. 그 중첩의 질적 확장을 거쳐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기를 사랑해주는 쓸 만한 사람을 갖는 것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쓸 만한 소년 애인을 갖는 것보다 더 크게 좋은 어떤 것이 있을지 나로서는 말할 수 없”다는(『향연』 71면) 아름다운 것, 좋아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에 이른다. 세밀하게 관찰해보면 그 찬미는 노자 55장의 에로스와 절정에서 호응한다.(51~52쪽)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모두 사랑이 있다 저자의 사랑에 대한 철학적 탐색은 테야르 드 샤르댕에 와서 절정을 이루는데, 테야르 드 샤르댕을 통해서 사랑은 어떤 근본원리로까지 격상된다. 예컨대 테야르 드 샤르댕에 의하면, “만일 아주 미약하나마 분자에게도 서로 하나가 되려는 욕구가 없었다면 높은 단계인 인간에게서 사랑이 나타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고 하려면 존재하는 것에는 모두 사랑이 있다고 해야 한다. 우리 둘레에서 수렴하며 올라가는 의식들 어디에도 사랑은 빠지지 않는다…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조각들이 모여 생명을 이룬다.”(104쪽)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저자의 집요한 천착은 왜 시작된 것일까. 저자는 서문에서 ‘세월호’를 호명하며 시작한다 : “세월호! 생명이 이렇게 헌신짝처럼 허망하게 취급되었던 시대가 있었던가. 물적 풍요가 만개하고 사소한 욕망의 언어로 들끓는 시대의 텅 빈 내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한반도의 미래는 마을 공화국! 저자는 현재 우리 사회를 “사랑이 부재하는 시대의 삶”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 진단이 낭만적이지 않은 것은, 사랑에 대한 사유를 공동체의 구성 원리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분단된 우리의 현실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6·15 공동선언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남북관계가 나날이 경직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저자는 역설적으로 “현단계 분단체제는 낮은 단계의 통일시대, 즉 과정으로서의 통일시대이며, 정확하게 통일이행기로 명명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6·15 공동선언이라는 사건을 만들어본 경험을 능동적으로 평가한 이후에 내려진 판단 같지만, 거꾸로 저자가 우려하는 현상의 출현을 막기 위한 절박한 상황에서 이념으로서 제시된 느낌도 든다. 저자는 말한다. 시대의 끝은 새로운 시대정신과 시대적 과제를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분단체제의 완성 혹은 끝을 향해 서 있는 ‘늑대인간’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괴물에 가까운 그 인간은 ‘짐승과 인간, 퓌시스와 노모스,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 역설적이게도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두 세계 모두에 걸쳐 있는 늑대인간의,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어떤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삶은 밝음과 어둠, 성취와 좌절, 과거와 현재, 분단과 통일, 불안과 희망을 함께 감싸고 있는 고통스런 삶이며, 그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삶이다. 그 시대를 우리는 ‘통일이행기’라고 명명할 수 있다.(99쪽) 그런데 저자는 왜 마을-꼬뮌을 통일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 삼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 저자는 국가란 것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며 그것도 사실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타국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자국민에게 더 많은 그리고 더 가혹한 폭력을 휘둘러 왔다고 말한다. 그래서 간디의 ‘마을 공화국’을 현대에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간디의 ‘마을 공화국’은 노자가 말한 ‘소국과민’과도 통한다는 것이다. 그 공화국의 기원은 노자의 소국과민과 근사하게 만날 수 있다. 그가 소국과민의 부족국가에서는 전쟁기계와 군대의 쓰임이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견해를 피력할 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