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우리는 홀린 듯이 금기를 향해 다가가는 것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요.” 다시 한번 교차하는 기이한 꿈, 비밀스러운 밤에 관한 몽환의 세계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폐관을 앞둔 서울의 유일무이한 오디오 극장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스물아홉 살의 김아야미를 내세워 기억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그리고 비밀스러운 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야미와 그가 만나는 사람들, 이를테면 암에 걸린 독일어 선생 여니, 극장의 폐관으로 아야미처럼 실업자 신세가 된 극장장, 소설을 쓰러 난생처음 서울을 방문한 독일인 볼피 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서사의 표면적인 중심이 된다. 하지만 반복되고 변주되는 만남들을 통해 소설은 오히려 시(詩)와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다른 배수아 소설이 그러하듯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주요한 스토리라인을 요약하려는 시도를 부질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몇 개의 인물과 설정과 세부 사항을 끊임없이 반복하거나 변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제목조차 갖지 않고 숫자로만 표시된 4개의 장에 걸친 이야기는 그물처럼 온 사방에 연결되어 있어 책을 펼친 독자가 아름답고 낯선 문장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여니’는 극장장이 아야미에게 소개해 준 독일어 선생이자, ‘부하’가 약을 배달하는 고객이자, 밤마다 그가 전화를 거는 텔레폰 서비스의 대화 상대이자 아야미가 근무하는 오디오 극장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낭독자이기도 하다. 또한 독일인 소설가 볼피가 만나기로 예정되었던 여자이자, 반복해서 걸려 오는 전화에 아야미가 대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 반복되고 변형되는 여니에 대한 묘사는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형식 자체를 묘사하는 것과도 같다. 마치 수수께끼처럼, 그러니까 덤벼들면 풀 수 있는 과제처럼.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그 모든 시도들이 무의미해진다. “이제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 배수아를 읽는 것, 형식적으로 직조된 현실 세계에 물음을 던지는 일 이 소설은 독자가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작가가 설정한 도착 지점에 당도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이 이야기 속에, 다시 말해 작가가 건설한 몽환의 세계 안에 영원히 머물기를 원한다. 장이 바뀌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무언가 뚜렷한 상황과 전개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여도 이내 인물들과 시공간은 꿈의 파편처럼 흩어져 의미와 존재 모두가 사라진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마지막에 남은 것은 “소리의 그림자”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 “보이지 않는 사람들” 같은 매혹적인 환상이다. “환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 환영의 출처를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니 포기하라. 포기하고 눈을 감아라. 그러면 한나절쯤 아주 희귀하며 기이한 꿈에 잠겨 있을 수 있을 것이다.” _김사과(발문 중에서) 독자가 구체적인 등장인물과 전통적인 기승전결이라는 소설 형식에 대한 강박을 버린다면, 배수아가 만든 몽환의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한국어 문장이 선사할 수 있는 희귀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이 될 것이다. 이는 배수아의 문학이 앞으로 어디로 향하고 어디로 우리를 데려갈지 기대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