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나는 요즘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습니다
나를 옮겨줄 건가요?”
새롭게 일으킨 몸의 안팎으로 언어를 경작하는 시인,
오늘날 한국 문단의 가장 뚜렷한 개성
차현준 첫 시집 출간!
시는 이름도 풍경도 아닌 채로, 나를 구석구석 드나들었다. 나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시가 다녀간 곳을 살펴본 덕에 내가 지닌 원 속으로 시를 따라 손을 넣어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앉아 있을 때는 원 뒤로 넓은 공간을 한없이 가질 수 있고, 누워 있을 때는 원 아래로 깊어진 깊이를 가질 수 있다.
―202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 소감에서
202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차현준의 첫 시집 『온몸일으키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데뷔 당시 “맹렬한 언어의 전진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평과 함께 “응모작 중 가장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었던 차현준은 ‘당귀’ ‘루콜라’ ‘측백나무’ 등을 소재로 한 식물 연작을 통해 시들지 않은 감수성과 최신의 트렌드를 두루 보여줄 신예의 등장을 예고했다. 추상적인 시 세계 안에서 “생활 세계의 느낌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한 가상적 리얼리티를 창출해내는”(문학평론가 조연정, 시인 하재연·황인찬) 그의 시 언어는 이전과는 다른 낯선 세계에 다다른 듯한 경험을 선사하며 시 언어의 개방성과 운동성을 동시에 끌어냈다.
새로운 시, 다른 시, 젊은 시를 기다려왔던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차현준의 첫 시집은 독특한 언어의 촉발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뒤표지 글에 시집의 유통기한 및 소비기한을 “표시할 수 있는 표시일까지”라고 밝힌 시인은 52편을 5부로 나눈 이번 시집을 천천히 나누어 “섭취”할 것을 권장한다. 시인이 설계한 내면의 복도에는 양쪽으로 마주 보는 방이 길게 늘어서 있고 독자는 서로 다른 작물이 생장하는 방을 넘나들며 신체의 안팎을 탐구하게 된다. 식물의 생장을 통해 자신의 몸을 새롭게 인식하는 화자는 기존의 신체 구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마치 식물이 땅속에서 뿌리를 뻗어 나가듯 한국의 도시와 자연은 물론 중남미를 지나 남극에까지 시공간을 확장해나간다. 이렇듯 거침없이 출력되는 단어는 시인만의 독특한 리듬과 언어 체계를 생성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온몸일으키기”를 할 수 있게 독려한다.
“먼저 만든 방들이 널려 있다”
새로운 공간, 다른 언어, 젊은 감각
남미 향을 담았다는 디퓨저를 책상에 놔둘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밭에 자주 찾아오는 편인데도 나는 늘 모르겠다. 입이 벌어지고 만다. 당장 흰쌀밥 흑미밥 사이사이 잡곡들…… 입에다 올려놔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찰기가 입안에서 몇 바퀴씩 감싼다고 생각해봐. 적당히 차진 밥을 한 품에 안아줄 당귀들이 여기 이렇게나 많고
작은 당귀밭
밭을 품고 있는 당귀 방
벽과 천장과 창문과 손잡이
제각기로 쳐다보는 당귀들
―「당귀 방」 부분
화자가 발을 내디딘 곳에는 저마다 다른 작물이 놓여 있고 “복도에 늘어선/적근대 방/치커리 방/상추 방/케일 방/겨자 방/호박잎 방······/내가 자처한 방들······”(「당귀 방」)을 빠져나온 후에는 다시 가족들의 뒤를 따라 또 다른 밭으로 이동한다. 이때 작물은 물을 흠뻑 머금고 해를 쬐며 자라나는 생장이 아닌, 타인과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다가 다시 사랑하며 자라나는 성장의 과정을 겪는다. 시 속의 화자는 해충처럼 번진 “거대한 방울토마토를 베어 물고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방울토마토 신드롬」)거나 “서로 손잡고 뭉쳐 있다 진액이 흘러나오지도 않는데 끈끈한 우정”(「루콜라」)을 보여주는 루콜라를 지켜보는 등 스스로의 심경 변화를 작물의 생장과 멈춤에 빗대어 투명하게 드러낸다. 자신과 관계 맺는 모든 대상을 성실하게 잘 일구어 수행해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성실함은 시인이 견지하는 삶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자기 스스로를 시에 사로잡힌 채로 발걸음을 굴리고 마는 “체험자”에 가깝다고 밝힌 바 있는 시인은 이렇듯 시와 매개하고 조율하며 시 속에서 자라고 시들기를 반복한다. 이명에 시달리는 화자가 이비인후과에 가서 “내가 당귀를 뽑아내고 고통이라도 심어놨나 봐요”(「당나귀」)라고 되묻는 데는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까지도 살아보려는 시도, 즉 시를 ‘체험’하는 행위를 넘어 온전히 살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차현준의 시는 일찍이 가상의 세계에 리얼리티를 부여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탐지해왔다. 식물을 기르는 것처럼 언어를 고르고 경작한 후에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살아내는 데 집중하는 차현준의 글을 반드시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규정 짓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나는 본격적으로 시로 시작되는 시공간을 살아본다. 체험할수록 쓸 것이 점점 구체적인 문장으로 차오르는 동안의 이 예열, 쓸 것을 더 잘 전달해보고자 한 발짝 물러나 식혀보는 이 서늘한 거리 둠. 예열과 거리 둠. 그 사이사이를 오가며 발생하는 이 몰입. 이 몰입이 좋아서 쓴다. 일단 진입해, 시가 차오르는 순간, 시를 목도하고 체험하려는 내가 여전히 시를 좋아하는 순간을 기꺼이 발견하고 나아가는 과정. 이것이 좋아서 쓴다.
―‘시작 노트’(『시 보다 2024』, 문학과지성사, 2024, p. 237) 에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온몸일으키기를 하는 언어들
지난해 구청에서는 이 길거리의 보도블록을 상당 부분 들어내고 새로운 블록들을 깔았습니다. 그 뒤로 나도 이 거리에 같이 누워 있습니다.
배 위를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따금 한국어를 쓰다 침을 흘립니다. 침은 내 몸에 자연히 스며듭니다. 나는 한국어 구사력과 침 흡수력이 좋거든요! 이건 방금 지나간 버스 밖으로 들렸던 라디오 광고에서 습득한 말투입니다.
―「온몸일으키기」 부분
“한국 가정 소속 현준은 잰말놀이를” 하고 “현준의 입안에서 놀던 라임은 나의 라임 나의 나임 나의 나의” 등으로 읽을 때마다 혀가 꼬이곤 한다. 지난해 문지문학상 시 부문 심사 당시 “차현준의 언어는 날렵하고 기민하고 유연하고 탄력이 있다”(시인 이수명)라는 평을 받은 시인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면서도 결코 언어의 경제성을 잃지 않으며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시 속의 화자는 마치 게임의 플레이어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유횻값을 도출해내고 엉뚱한 질문들로 평범한 일상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방전되지 않은 채 “두툼한 보조 배터리를 한 손으로 말아 쥔”(「얼마간 흘려보내보기」) 채로 “공중에도” “길바닥에”도 가득한 “포스트잇”(「붙여놓기」)처럼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는 언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각을 자극한다.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최선교의 말을 빌리자면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우리말샘에”(「다중생활체」)서 쇼핑을 하듯 고른 단어들을 정확한 장소에 배치하여 꾸민 문장은 어색하지만 정확하고, 분명하지만 어딘가 잘못 찾아온 느낌이 든”다. 표제작 「온몸일으키기」에서 새로 깔린 보도블록 위에 누워 자신의 배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이 흘린 침을 흡수해 한국어를 구사한다고 말하는 시인은 일상 언어를 시 언어로 둔갑시키지 않고 차현준식으로 발화하고 있다. 차현준의 언어는 이면의 그늘이나 다른 함의를 품지 않은 채 시 속에서 끊임없이 수다를 이어간다. 대상을 설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 세계는 우리 모두 스스로 정해둔 한계를 극복하고 쑥쑥 자라날 때가 됐다는 듯 기지개를 켜고 가장 환한 초록 불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