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시한폭탄>,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팽 선생』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1981~82년에 쓰인 볼라뇨의 초기 작품으로 1994년 첫 출간 당시 스페인의 펠릭스 우라바옌 중편 소설상을 수상했다. 『팽 선생』은 전체주의 혹은 사회 전체의 그늘 아래 개인의 고독감과 존재 증명에의 욕구가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이야기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치밀한 내면 묘사가 압권이다.
『팽 선생』은 단순한 이야기 구조 안에 등 볼라뇨가 창조해 온 세계의 근간이 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전쟁과 전체주의를 매개로 인간의 편집증과 광기를 이끌어 냈던 볼라뇨의 또 다른 작품 『제3제국』과 그 줄기를 같이하기도 한다. 『제3제국』이 전쟁 게임을 소재로 전체주의에 대해 다소 직선적이고 순차적인 접근을 했다면, 『팽 선생』은 최면과 꿈, 미로, 미행 등 미스터리적 요소를 통해 우회적이고도 교묘한 방법으로 접근한다. 2010년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당시 「뉴욕타임스」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고 전했는데, 이는 볼라뇨가 꿈과 현실이 모호하게 뒤섞인 상황을 내세워 전하려 했던 그 크기를 짐작하는 것조차 어려운 『팽 선생』 속 악의 존재를 잘 설명해 준다.
훗날 볼라뇨가 『2666』이라는 대작에서 악의 본질과 기원을 파헤치려는 본격적인 시도를 했다면, 『팽 선생』에서는 악이 뒤덮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팽 선생이라는 반(半)허구, 반(半)실존 인물의 행적을 통해 비유적으로 보여 준다. 볼라뇨가 문학으로서 일궈내려 했던 수많은 가치들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단순하고도 흡입력 강한 이야기 흐름까지 갖춘 『팽 선생』은, 이제 막 볼라뇨의 문학 세계로 들어서 보려 하는 독자에게는 훌륭한 첫 번째 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볼라뇨의 작품을 읽은 독자에게는 볼라뇨 소설의 근원을 탐미할 기회를 줄 것이다.
실제와 허구를 뒤섞어 만들어 낸
악(惡)으로 뒤덮인 세계를 떠도는 무기력한 초상들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암울하고도 뒤숭숭한 파리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최면요법가인 팽 선생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의 멎지 않는 딸꾹질을 치료하기로 하면서 벌어진 사건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 낸, 일종의 모험담이다.
전쟁에서 폐에 손상을 입고 제대하여 장애 연금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는 팽 선생은 사회적 약자의 전형이면서, 자신을 둘러싼 사회가 움직이는 방향과 그 기준을 모른 채 작은 존재로 살아가는 개인의 전형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시인 바예호는 실제로 파리에서 알 수 없는 폐 질환으로 초라하게 죽었으며, 스페인의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국제 여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행동파 시인이었다. 악의 흐름을 인지하고 어떻게든 세계의 방향을 돌려 보고자 했으나 결국 모국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힘없이 죽어 가는 시인 바예호와, 그런 바예호의 딸꾹질을 치료하겠다고 나섰지만 병의 원인도,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의 정체도 알 수 없었던 팽 선생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개인들의 초상이다. 갑자기 나타나 바예호의 치료에서 손 뗄 것을 강요하며 팽 선생을 괴롭히는 정체 모를 스페인 남자 두 명은 일종의 악의 상징으로, 소설 내내 옥죄어 오는 불안의 근원이자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바예호는 물론이고 그의 부인 조르제트 바예호, 팽 선생이 가르침을 받은 최면학자 메스머, 심령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고자 했던 바라뒤크, 그리고 아라공, 다르송발, 이렌느 졸리오퀴리 등 실존 인물과 실제 역사적 흐름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이들의 실제 삶과 볼라뇨의 문학적 상상력이 뒤섞이면서 독자는 이 이야기 속 실제와 허구의 비율이 각각 얼마씩인지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나 아마도 볼라뇨가 의도했을 이 혼란스러움은 <환상을 현실처럼, 현실을 환상처럼> 느끼게 되는 초현실적 감각을 가져다주며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당긴다.
볼라뇨의 죽음으로 인해 독자들의 몫이 된
불안과 혼란으로 범벅 된 미완의 직소 퍼즐
침대에 누워 『팽 선생』을 읽으면서, 나는 갑작스러운 불안감과 뒤섞인,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어마어마한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게 누구인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 어슐러 K. 르귄
볼라뇨의 작품에는 평온함이 없다. 당장이라도 현실이 될 수 있을 법한 불안한 꿈들만 등장한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이미지, 상징, 사건, 등장인물들은 충격적이다. 이것들은 같은 책 혹은 볼라뇨의 다른 저작에 거듭 등장해 강한 인상을 주고, 주장을 한다.
- 아후벨
볼라뇨는 2003년 간 부전으로 사망했다. 아쉽게도 볼라뇨 본인이 『팽 선생』에 대해 남긴 말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가 떠난 지금 우리로서는 그 의미를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페루의 작가 페르난도 이와사키는 볼라뇨와 『팽 선생』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볼라뇨의 건강 상태가 심각한지 모르고 있었다. 그의 단편과 장편을 읽으면서도 <임박한 죽음>은 단지 문학적 강박 관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가 자신의 병환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비탄함에 잠기지 않고서는 『셋』(2000),『칠레의 밤』(2000),『참을 수 없는 가우초』(2003)를 읽을 수 없었다. 그렇게 비통해하며 나는 『팽 선생』을 다시 읽었다. 그래서 <Pain>이 <빵>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고통>이라는 뜻인지 너무 신경이 쓰인다.*
*프랑스어로 <pain>은 <빵>을 뜻한다. 공교롭게도 영어의 <pain>과 철자가 같다.
그렇다면 『팽 선생』이라는 미스터리의 결말은 어떻게 지어질까? 읽는 이 모두 각자 나름의 해석을 가질 수 있겠으나 확실한 것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읽기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볼라뇨가 의도적으로 조성한 미로 안에서 혼란스러웠던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명쾌한 느낌을 받지 못한다. 시작과 끝은 절대 명확하지 않고 시작이 끝일 수도 끝이 시작일 수도 있다. 한 리뷰어는 <전부 읽은 뒤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팽 선생』에 대해 어떤 이는 전체주의에 대한 문학적 저항이라고도 했고, 어떤 이는 평생 시인으로서 주목받지 못하고 정치적 이유로 핍박받아야 했던 바예호의 쓸쓸한 죽음이 볼라뇨 자신의 초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팽 선생이 볼라뇨의 초상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것의 윤곽을 짐작만 할 뿐 그것의 정확한 형태는 파악하지 못하고 불안과 혼란에 떠는 그 모습이 당시 볼라뇨가 처했던 상황을 대변한다고 했다.
그가 남기고 간 모든 작품들은 마치 직소 퍼즐처럼 서로 얽혀 있으며 서로 연관하여 읽을수록 빛을 발한다. 이 직소 퍼즐은 영원히 미완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퍼즐의 윤곽을 맞춰 가다 보면 독자 나름의 의미 있는 결론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야만스러운 탐정들』『2666』과 같은 볼라뇨의 대표작들이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이때에 그의 초기 작품을 읽는 것은 그의 문학적 세계관을 더 깊숙이, 좀 더 <원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