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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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한없이 가까워지는 ‘느낌’의 세계 그 매혹적인 세계로의 다정한 초대 2000년대 한국 시단의 거부할 수 없는 뉴웨이브, 김행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타인의 의미』가 출간되었다. 2007년 『이별의 능력』 이후 3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 실린 65편의 시편들은 우리를 독특하고 매혹적인 풍경으로 초대한다. 1999년 김행숙의 등단은, 황병승, 김경주, 하재연 등으로 이어지는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폭죽 같은 에너지를 촉발하였다. 기존의 시가, 서정적 자아의 실존, 혹은 그 자아가 느끼는 감각의 결과에 주목했다면, 김행숙의 시는 찰나의 감각 그 자체, 감각의 진행 과정에 주목한다. 그녀는 그저 어떤 대상을 마주했을 때 그 찰나의 감정에 매달릴 뿐이다. 그녀의 이전 시들이 “‘세계’를 느낌의 조각들로 분해하고 ‘나’를 해체”하는 ‘미시적인 세계’를 그렸다면, 이 시집은 그 느낌의 세계 안에서 ‘나’와 ‘타인’이 만나는 찰나, 그 사이, 즉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그려 낸다. 그런 그녀의 시는 낯설고 모호하지만, 우리가 일단 그 느낌의 영역, 그 느낌의 세계에 발을 담그면 더할 수 없이 은밀하고 끈끈한 연대와 공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녀의 시를 읽으며, 놀랍도록 천진하고 엉뚱하고 섬세하고 발랄한 어떤 열렬한 ‘느낌’의 세계를 조우하게 된다. 그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 한 글자 한 글자 녹일 듯이 뜨거운 목소리로 그 순간의 느낌을 가장 강력하게 발음하는 시 2003년 첫 시집 『사춘기』로 김행숙 시인은 전통적인 의미의 서정시와 뚜렷이 구분되는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하였다. 의미나 이미지보다 느낌과 감각을 살린 그녀의 시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를 예고하며 “경계에 걸려 흔들리는 불안한 감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2007년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을 통해 그녀만의 독특한 블랙 유머와 위트의 세계를 그려 냈다. ‘세계’를 느낌의 조각들로 분해하고 ‘나’를 해체하여, ‘미시적인 세계’ 즉, ‘이것’과 ‘저것’이 서로 경계 없이 넘나드는 세계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안정된 세계라고 믿는 세계를 붕괴시키고 조롱하였다. 세 번째 시집 『타인의 의미』에서 그녀는 “나와 다른 존재와의 사이, 아주 좁으면서도 감각과 사유의 운동이 일어나는 격렬한 공간”을 노래한다.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포옹」 이 시에서 포옹의 주체와 결과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진행 중인 포옹의 움직임과 방향을 감각하게 할 뿐이다. 포옹은 ‘나’와 ‘너’가 신체적으로 밀착되는 물리적인 사건이다. 즉 주체와 대상의 물리적 거리가 사라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 포옹이 ‘나’와 ‘너’를 완전한 하나로 만들지는 못한다. 한없이 가까이 다가간다 해도, ‘사이’는 남는다. 그저 ‘나’와 ‘너’의 몸은 그 ‘사이’에서 ‘교차’할 뿐이다. 그녀 시의 독특함은 바로, 그녀가 사물을 대하는 거리에 있다. 그녀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거리보다 한 발짝 앞서 있거나 물러서 있다. 남들과 다른 지점에 서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화자의 미묘한 위치야말로 그녀의 시가 가진 낯선 서정의 비밀이다. 김행숙이 한국 시사의 그 어떤 계통에도 속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우리는 그녀의 시를 통해, 시의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현실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발견하고 충격받는다. 그리고 이 충격으로 인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시를 낯설고 매혹적인 것으로 만든다. ■ 내 안의 무수한 타인의 살갗을 만지는 시간 ‘마음’은 무정형이다. 그런 마음의 형상이란, ‘타인과의 관계’, ‘타인과의 만남’에서 빚어진다. 그 관계로 인해 나의 ‘마음’, 즉 ‘나’의 형상은 반응하고 느끼며, 유지된다. 그래서 김행숙 시인은 지금, ‘타인’을 이야기한다. 시집의 제목인 ‘타인의 의미’란 무엇인가. 사실 이 시집은 ‘타인의 의미’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시인은 타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재론적인 감각을 말한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걸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꿈꾸듯이」)라는 질문에 우리는 무언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만지러 가고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접촉하는 우리는 그 접촉과 동시에, 우리를 접촉하고 있는 ‘타인’을 만난다. “네 눈빛은 아주 먼 곳으로 출발한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라는 시구처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눈빛을 던지고 있는 타인은 여전히 아주 먼 곳에서 출발하는 자이다. 우리는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좀 더 가까이 접촉하길 원한다. 피부의 접촉은 아무리 가까워도 그 가까움에 만족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만지는 일은, 내가 너를 만나는 일은, 결코 “쉴 수 없는 여행”인 것이다. 그녀의 시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계가 없고, 우리가 믿고 있는 그 자아가 없다. 그 둘은 분해된 채로 뒤섞였다가 나눠지고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 준다. 그녀의 시는 과도하고 격렬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가볍고 유연하며 자유로운 방식으로 다른 세계를 발명한다. “잠든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발걸음 같은 것이 나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너만 보호하네.// 나는 보일 듯 말 듯. 들릴 듯 말 듯. 나는 티를 내지 않는다.”(「유령 간호사」) 그녀의 느낌의 세계는 이토록 따뜻한 배려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금 무척 아프고 헛것을 보고 있”는 너를 보호한다. “너는 예뻐. 너는 똑똑해. 너는 착해. 칭찬을 나누고.”그녀의 시는 “너의 전부를 물들”일 것이며, “언제라도 어디라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녀의 시를 읽는 한 더 이상 “우리는 쓸쓸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