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를 욕보이다

아서 단토 · Humanities
3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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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의 현대예술철학 3부작 중 마지막 권이다. 3부작 중 제1권인 <일상적인 것의 변용>이 현대예술작품의 존재론이고, 제2권 <예술의 종말 이후>가 현대예술철학사라면, 이 책은 현대예술계에서 배척당한 미의 능욕의 역사를 들려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발명되어 오랫동안 예술과 동일시되었던 미는 어떻게 모더니즘 예술, 특히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예술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났는가? 미에 등을 돌리고 ‘쿨’해지기로 한 결심, 더 이상 ‘망막의 전율’을 위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지 않겠다는 현대예술가들의 결단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아름답지 않은 것, 노골적으로 추하고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운 것들도 예술일 수 있다면 이제 예술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 책은 예술에 대한 기존의 정의가 모두 무너져내린 ‘예술의 종말’의 시기에 새로운 예술이론, 예술철학을 다시 세우려 시도한 단토의 개인적 고백이자 철학적 모험담이다. 미의 추구와 숭배에서 미의 포기와 경멸로의 극적인 여정을 더듬으며, 단토는 미를 파괴하려는 현대예술의 충동을 건강한 움직임으로 긍정하는 한편, 그럼에도 여전히 ‘미는 행복의 약속’이며 우리의 삶에 필수적인 가치라는 믿음을 견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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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서문 11 감사의 말 31 서론 : 브릴로 상자의 미학 35 1 미 그리고 예술의 철학적 정의 59 2 반항적인 전위예술 95 3 미 그리고 미화 133 4 내재적 미와 외재적 미 167 5 미와 정치 205 6 예술을 생각하는 세 가지 방법 241 7 미와 숭고 273 옮긴이 해제 304 옮긴이의 말 330 찾아보기 336

Description

아서 단토의 현대예술철학 3부장 중 마지막 권 아름답지 않은 것, 추하고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도 예술일 수 있다면 이제 예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미, 왕좌에서 물러나다 이 책은 단토가 2001년 미국철학회 연례모임에서 ‘미에 대한 반란’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세 차례의 카루스 강연을 바탕으로, 현대예술에서 미의 문제를 다각도로 탐구한 저작이다. 미는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발명된 이래로 오랫동안 예술과 동일시되었다.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위대한 미학의 시대’에 예술과 미, 미와 선(도덕)의 관계는 공고해졌고, 아름다운 예술에 의한 정신의 고양은 문명의 우수성으로 예찬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란 야만을 목격하며, 일군의 예술가들은 예술과 미, 도덕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기성 견해에 반감을 품었다. 미 때문에 예술을 소중히 여기는 위선적 사회를 향해 공공연히 도덕적 혐오를 표현했고, 급기야 ‘미를 암살하려는’ 욕망을 선언했다. 예술가는 부도덕한 사회를 위해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예술이란 그 자체로 역겨울 뿐이다! 단토가 ‘반항적 전위예술’이라고 부르는 이들 다다이즘 예술가들은 랭보의 전통에서 ‘미에 욕설을 퍼붓고’, 뒤샹의 충고대로 더 이상 ‘망막의 전율’을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아름다움 대신 의도적으로 추하고 역겹고 혐오스러운 것, 외설적이고 익살스러운 것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구더기가 들끓는 소 머리를 오늘날 엄연히 예술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계몽주의 시기의 미학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반항적인 전위예술이 얼마나 완벽히 승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64년 단토가 〈예술계〉를 발표하여 ‘예술의 정의’ 논쟁을 촉발할 무렵, 예술은 또 다른 반미학 혁명을 맞이했다. 팝아트와 플럭서스 운동, 개념미술은 삶과 예술의 간극을 메우고, 순수예술과 통속예술의 차이를 지워나갔다. 이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춤이 되고, 침묵도 음악일 수 있었다. 단순히 포옹을 하거나 전등을 켜고 끄는 것도 예술로 인정받았다. 과거에 사람들이 예술 개념에 속한다고 여겼던 것들은 말소되었고,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이 혁명의 그늘에서 미는 예술과 예술철학 모두로부터 외면당했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이제 미는 “단지 경멸을 불러오고, 나이 지긋한 그 노부인은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외설적이라서가 아니라 아름답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섹스와 폭력을 그리는 것은 괜찮지만 아름다운 것을 그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전통적 미학에 등을 돌리고 ‘쿨’해지기로 한 반항적 전위예술의 결심, 고상한 취미의 세계에서 유희적 악취미의 세계로의 이 전환이, 20세기 예술철학에게는 ‘건강한 움직임’이자 ‘엄청난 진일보’였다고 단토는 긍정한다. 반항적인 전위예술은 미가 예술 개념의 전부가 아니며, 아름답지 않은 것도 얼마든지 훌륭한 예술일 수 있고, 미가 있든 없든 여전히 예술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예술철학은 지리멸렬했던 미학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예술이 우리 삶에 지니는 의미를 다시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의 종말 그리고 ‘구현된 의미’로서의 예술작품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것은 예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 즉 예술에 대한 정의가 시급해진다. 예술을 단순히 ‘미의 창조’ ‘모방적 재현‘으로 간주하는 옛 정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이전의 미학 담론에서 예술 개념으로 여겼던 많은 것들이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서 예술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미래의 예술이 어떤 새로운 작품을 낳을지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도 마침내 예술을 철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단토의 ‘예술의 종말’ 개념이다. ‘예술의 종말’이 아도르노에게는 예술의 쇠퇴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고, 헤겔에게는 정신이 더 이상 감각에 호소할 필요가 없어지는 최고 단계로의 고양이었다면, 단토에게는 예술의 다원주의가 확립된 후 마침내 역사를 초월한 예술철학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물음에 더 이상 예술의 역사가 전복시킬 수 없는 답을 내리는 작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단토의 예술에 대한 정의에서 핵심 개념은 ‘구현된 의미’다. 단토는 예술작품을 하나의 자기완결적 구조로 보거나 사회문화적 산물로 보기보다는, 먼저 작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나의 관심은 항상 작품에 비언어적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그 생각이 무엇인가에 있다. 우리는 작품이 구성된 방식에 기초해 작품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지적 산물로, 그 예술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해석을 통해 파악되며, 작품의 아름다움은 그 의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단토는 칸트 미학에는 이러한 의미 개념이 결여되어 있으며, 헤겔의 미학에 힘입어 우리는 비로소 취미의 영역에서 의미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구현된 의미’라는 개념의 이해를 위해, 단토의 예술철학에 줄곧 영감을 주었던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왜 예술작품이고, 그것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슈퍼마켓의 수세미 포장상자는 왜 예술작품이 아닌가? 전통적 미학은 왜 하나는 예술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아닌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둘 다 똑같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브릴로 상자〉에 예술작품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그 의미라고 단토는 말한다. 이때 브릴로 상자 자체의 디자인적인 아름다움은 워홀의 〈브릴로 상자〉에는 외재적(부차적)이다. 소변기의 아름다움이 뒤샹의 〈샘〉에 외재하듯 말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그 작품의 의미, 생각, 내용의 일부로서 내재적(필수적)인 경우들이 있다. 단토는 마티스의 〈푸른 누드〉, 로버트 머더웰의 〈스페인 공화국에 바치는 애가〉, 마야 린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등의 사례를 분석하며 ‘내재적 미’라고 자신이 명명한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단토는 반항적인 전위예술이 예술의 정의에서 미를 폐위했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미 자체를 생각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포함해 미학적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앞으로 예술에서 미가 전멸한다고 해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에는 다른 보완적 가치들이 많이 있으며, 미는 세계의 예술문화에서 부수적인 속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에는 다른 미학적 성질들과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는 진과 선처럼 하나의 보편적 인간 가치이기도 한 유일한 미학적 성질이다. 선이 전멸한다면 인간적 삶이 불가능해지듯이, 미가 전멸한다면 견딜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단토는 미가 우리에게 충만한 삶의 의미를 정의해주는 가치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없는 미를 보려 하다 - 내재적 미와 외재적 미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내재적 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르네상스의 원리에 따르면 그림은 세계를 보여주는 투명한 창이었다. 즉 그림은 세계의 아름다움을 반영할 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모더니즘 회화는 이러한 투명성을 포기했고, 그저 대상을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볼 만한 대상이 되고자 했다. 만일 우리가 피카소의 〈마졸리〉 같은 추상화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그 아름다움은 이제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미화 때문이 아니라(그림만 봐서는 피카소의 아내 졸리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어떤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워야 했다. 그렇게 현대예술비평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먼저 단토는 마티스의 1913년작 〈푸른 누드〉를 예로 든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아름답지 않다. “만일 누군가가 마티스에게 모델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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