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러와 미켈란젤로, 동시대의 위대하지만 많이 다른 르네상스 미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보다 네 살 위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뉘른베르크 출신이었다. 뉘른베르크는 유럽 내륙의 경제 중심지로 상공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활발한 경제활동은 문화적 융성을 가져왔고, 이 지역에서 르네상스의 기운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르네상스 미술가로서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성, 권력은 금세공인 집안의 아들 뒤러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는 뉘른베르크 출신이었다. 뉘른베르크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윤택한 도시였지만, 이탈리아도 로마도 아니었다. 뒤러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지중해와 로마를 향했다. 아마도 로마에 꼭 가보고 싶어 했을 뒤러는, 두 번이나 이탈리아를 향해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미술 유학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결국 로마에 가보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최고의 르네상스인이 되려는 야망이 있었지만, ‘주변’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도제를 거쳐, 메디치 가문이 만든 예술아카데미로 들어간다.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나간 패기만만한 청년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입성한다. 그리고 이미 20대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의 제작을 주문받아 성공적으로 납품을 마친다. 당시는 종교개혁이 유럽에서 점차 위력을 넓혀가던 시절이었고, 가톨릭 세력은 교황의 도시 로마를 위대한 미술의 도시로 리모델링해, 가톨릭의 위대함을 과시할 이미지 정치의 계획을 세우던 때였다. 이제 로마는 모든 미술가들이 꿈꾸는 기회의 땅이 되었다. 회화, 조각, 건축 전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미켈란젤로가 이 거대한 프로젝트 속에서 전방위적으로 활약을 펼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로마와 르네상스를 뛰어넘으려고 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분투할 필요도 없었지만, 남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어디에나 고대 문화유산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로마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미(美)에 몰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중심’ 사람이었다.
신교와 구교, 북유럽과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건설하겠다는 뒤러의 야망과 르네상스를 넘어야 한다는 미켈란젤로의 강박, 그리고 주변과 중심
신준형의 시도는 굳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설계다. 왜냐하면 르네상스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정답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르네상스는 고전 문화의 화려한 부활이었고, 근대 서양 문명의 토대였으며, 천재들과 명작들의 시대로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확고해 보이기만 하는 정답을 배경으로 뒤러와 미켈란젤로 역시 같은 톤으로 그려주고, 대중들이 이 정답을 익숙하게 소비할 수 있도록 적당히 가공해주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수백 년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 이런 정답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저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설계 작업에 들어간다.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 입장에서의 르네상스다.
“서구의 학자들이 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것. 이방인의 시각으로, 즉 유럽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솔직한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의 책을, 옥시덴탈리즘을 인정하는 책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는 책을 한번 써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다 건너 이방의 대륙에서 먼 숲을 보는 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테마는 바로 문화의 중심부와 주변부이다.”
-본문 7~8쪽-
한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윤택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중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로마와 뉘른베르크는 단지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탈리아와 독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16세기의 상황에서는 문명의 중심지와 주변부를 의미했다. 뒤러의 삶과 예술에 끌려 나의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핵심에는 그가 보여준 거의 강박적인 르네상스 이상의 추구, 교만에 가까운 자아의 선언, 명성을 향한 욕구가 있었다. 이는 그가 주변부 지역의 화가였고 일생 그 사실을 첨예하게 의식하고 살았음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뒤러에게 적지 않은 동질감을 느끼고 공감했다.”
-본문 216~217쪽-
한국에서 외국에 유학을 다녀왔느냐의 문제는 중요하다. 외국, 특히 미국 유학은 한 계단 높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이는 분야를 막론한다. 한국이 잘 나가지 못하던 때,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면에서 결핍되어 있던 시기에는 이른바 ‘외국물’이 주는 실제 효용이 있었다. 이제 경제강국으로 크게 부족함이 없는 나라가 되었지만, 여전히 유학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비단 유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주변’인 셈이고, 중심과의 관계가 늘 관심의 집중을 받는다.
서양 르네상스 미술사를 공부하는 한국 저자가 자신의 학문에서 찾으려는, 우리에게도 쓸모 있을지 모를 인문학적 통찰은 이 지점에 있다. 잘나가지만 중심을 신경 써야 하는 뒤러와 그의 도시 뉘른베르크, 주변에서 주목을 받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도시 로마를, 미술사라는 학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미술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고, 이것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두 도시의 예술가는 세계와 자신을 어떻게 그려냈을까? 이들이 바라보고 그려내는 방식에는 자신들이 살았던 두 도시의 다른 환경과 조건이 어떻게 작용했을까?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찰스 디킨스는 혁명기 파리와 런던을 가지고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를 썼지만, 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기 뉘른베르크와 로마를 가지고 16세기 판 두 도시 이야기를 쓴다.”
-본문 10쪽-
뒤러와 미켈란젤로, 그 주변과 중심의 이야기. 먼저 이방인이다
조선시대 한국에서 그려진 풍속화에 한국 사람들이 나오듯이,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그려진 그림에는 백인들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시대 그림에는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와 관계가 깊다. 예를 들어 예수의 탄생 장면 그림에는 흑인이 등장한다. 중세의 신학 전통은 예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왕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아프리카 왕이라면 등장인물로 흑인의 모티프가 필요했던 것이다. 뒤러와 미켈란젤로, 주변과 중심은 어떻게 이방인을 그려냈을까? 더 정확하게 말해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미켈란젤로는 이방인에 큰 관심이 없었다. 르네상스 회화에 종종 등장하는 흑인이 그의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이방인인 무슬림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그가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고대 로마는 제국이었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사실상 인종의 전시장이었다. 로마의 시민권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을 뿐, 시민권을 얻고 능력만 있다면 제국의 고위직에 오르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인종을 기준으로 한 이방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미켈란젤로가 활동하던 시기 이탈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세계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던 이탈리아에서 인종이 다르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역사적 전통과 시대 상황에서 인종이 다른 이방인이라는 점이 미켈란젤로 같은 대가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다양한 형태의 인간들을 추상화했다. 그의 작품 속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를 모두 비슷한 신체를 지니고 있다. 그에게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개별적인 차이라는 것은 큰 의미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중심이 만들어준 특징이었다.
뒤러는 어땠을까? 뉘른베르크는 유럽 내륙에 위치한 곳이었다. 상공업이 발달했지만, 외국 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