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마누엘 푸익 · Novel
3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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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2권. 대중문화로 예술성을 창조하며 20세기 후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주도한 아르헨티나 대표 작가 마누엘 푸익 소설. 푸익은 영화 기법 등 문학 외적인 예술 장르를 차용하여 문학의 지평을 넓힌 동시에 대중성을 확보한 작가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은 앞서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구사한 대화체 구성을 다시금 시도하며 그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다. 또한 그가 영어로 초고를 쓴 유일한 소설로, 작품의 배경도 전작들과는 달리 라틴아메리카가 아닌 뉴욕을 택했다. 망명자 신분의 노인과 그에게 고용된 미국인 사이의 대화를 심리 게임처럼 풀어나가며,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도약했다. 푸익의 대표작 <거미여인의 키스>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두 남자의 대화로 진행된다. 74세의 노인 라미레스는 아르헨티나 반체제 인사로 국제인권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뉴욕의 요양원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36세의 미국인 청년 래리는 시간제 노인 요양사로 일주일에 세 번 보수를 받고 라미레스를 찾아가 휠체어를 밀며 산책을 돕는다. 타국에서 병든 망명자의 신분으로 지내는 라미레스와, 사회에 흡수되지 못하고 하루하루 근근이 생활하는 래리 사이의 대화는 독자들을 오해와 이해 사이에 위치하게 한다. 라미레스는 기억을 잃고 특정 단어에 집착하며 래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연극을 하듯 태연하게 상황을 꾸며내기도 한다. 또한 끔찍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통증이 사라진다고 억지를 부린다. 래리 역시 집요하게 그의 과거를 묻는 라미레스에게 허구와 진실을 가리기 어려운 모호한 이야기만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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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제2부 해설 | 열린 작품과 저주받은 독자 마누엘 푸익 연보

Description

봉인된 기억을 파고드는 고도의 심리 게임 『거미여인의 키스』를 잇는 푸익의 대표작 대중문화로 예술성을 창조하며 20세기 후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주도한 아르헨티나 대표 작가 마누엘 푸익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2번으로 출간되었다. 푸익은 영화 기법 등 문학 외적인 예술 장르를 차용하여 문학의 지평을 넓힌 동시에 대중성을 확보한 작가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은 앞서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구사한 대화체 구성을 다시금 시도하며 그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다. 또한 그가 영어로 초고를 쓴 유일한 소설로, 작품의 배경도 전작들과는 달리 라틴아메리카가 아닌 뉴욕을 택했다. 망명자 신분의 노인과 그에게 고용된 미국인 사이의 대화를 심리 게임처럼 풀어나가며,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도약했다. 대중문화로 예술성을 창조한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 문학의 지평을 넓힌 새로운 글쓰기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환상과 신화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붐 세대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변화한 현실을 자각하고 대중문화의 매력을 이용한 포스트붐 문학이 창성한다. 마누엘 푸익은 포스트붐 문학의 중심에서 영화 기법을 차용하거나 연재소설 구조를 패러디하는 방식 혹은 탱고나 볼레로 같은 대중가요의 가사를 인용하는 방식 등 실험적인 기법을 선보이고, 여성이나 동성애자의 목소리를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분위기와 소외된 집단의 현실을 작품에 깊이 투영시키며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영화로 옮겨져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거미여인의 키스』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등의 작품에는 이러한 푸익의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번에 초역된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은 전작들과는 다른 특성을 더해 푸익의 색다른 면모를 살필 수 있는 특별한 작품이다. 라틴아메리카가 아닌 뉴욕이라는 외국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며, 푸익의 소설 중에서는 유일하게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초고가 쓰였다. 이는 푸익이 독재 정권이 지배하는 아르헨티나의 정치 상황에 회의를 느끼고 오랜 세월 여러 곳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했다는 점과 관련지어볼 수 있다. 푸익은 1976년부터 뉴욕에 머물며 한 미국인 청년과 계약을 맺고 돈을 지불하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그 내용을 변주하여 이 작품을 집필한다. 거짓과 진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암호화된 과거를 해독해나가는 대화들 푸익의 대표작 『거미여인의 키스』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두 남자의 대화로 진행된다. 74세의 노인 라미레스는 아르헨티나 반체제 인사로 국제인권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뉴욕의 요양원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36세의 미국인 청년 래리는 시간제 노인 요양사로 일주일에 세 번 보수를 받고 라미레스를 찾아가 휠체어를 밀며 산책을 돕는다. 타국에서 병든 망명자의 신분으로 지내는 라미레스와, 사회에 흡수되지 못하고 하루하루 근근이 생활하는 래리 사이의 대화는 독자들을 오해와 이해 사이에 위치하게 한다. 라미레스는 기억을 잃고 특정 단어에 집착하며 래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연극을 하듯 태연하게 상황을 꾸며내기도 한다. 또한 끔찍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통증이 사라진다고 억지를 부린다. 래리 역시 집요하게 그의 과거를 묻는 라미레스에게 허구와 진실을 가리기 어려운 모호한 이야기만을 들려준다.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의 대화는 차츰 서로의 과거를 탐색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과거를 탐색하며 서로의 삶에 침투해가는 대화가 팽팽해지는 지점에서는 두 사람의 정체성이 뒤섞이기도 한다. 라미레스는 래리인 듯, 래리는 라미레스인 듯 상대의 기억 속에서 과거를 이야기한다. 밀고 당기는 심리 게임이 이어지며 그들의 과거는 차츰 윤곽이 잡혀간다. 푸익은 ‘대화’라는 소설적 기법을 통해 두 사람의 개인적인 상처와 시대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인물의 심리 상태를 미묘하게 그려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누구의 이야기인지가 혼란스럽게 뒤엉키는 모호한 상황 자체는 이 작품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는 메시지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대화’라는 소설적 기법을 통해 두 인물의 기억과 심리 상태, 그리고 팽팽한 심리전을 그려내는 이 작품은 텍스트와 독자의 관계를 다루며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라미레스는 래리에게 책을 읽을 때 들리는 목소리에 관해 물으며 작품과 자기 자신의 대화 관계를 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두 인물은 ‘읽기’라는 행위를 할 때, 행위 주체인 독자의 내면에 텍스트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목소리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나’가 아니라 다른 목소리로 나타나는 ‘나’로, 텍스트를 이해하는 또다른 자아이다. 타자화된 자아는 열려 있는 텍스트를 읽으며 스스로 공백을 메우고 능동적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한다. 이 소설 속에서 래리는 독자로서 라미레스의 옥중 수기를 읽는다. 라미레스는 아르헨티나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당시 프랑스 소설 내 단어에 숫자를 매겨 문장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했다. 래리는 역사학을 공부했고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많은 까닭에 정치활동을 하다 수감된 반체제 인사의 기록을 해독하는 데 열의를 보이며, 이를 기회로 자신이 예전에 속했던 사회로 복귀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라미레스는 “당신이 읽고 있던 메모라는 것은…… 나는 그 메모에 있는 그 어떤 단어도 믿지 않아요…… 그 단어들은 소설 같아요. 게다가 아주 오래된 거지요. 당신은 그 메모를 읽고 그 안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있어요……”라며 래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음을 비난한다. 래리의 ‘독서’를 통해 라미레스의 과거가 그려지고, 라미레스는 래리가 해석한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래리의 해석이 얼마나 정확한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모든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고 모든 것이 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에 모든 해석은 유효하다. 그렇기 때문에 푸익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독자는 자유롭게 두 남자의 대화를 읽고, 해석하고, 자신만의 감상을 지닐 수 있다. 이 작품의 제목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또한 이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소설은 ‘이 글’이 어떤 글인지,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지목해주지 않는다. 프랑스 소설책에서 래리가 해독한 첫 구절이 ‘malediction… eternelle… a… qui lise… ces pages(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이라는 점에 미루어보았을 때, 라미레스의 암호화된 글을 읽는 래리가 저주를 받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고정된 해석은 아니다. 푸익은 이 작품의 해석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작품의 제목, 라미레스의 옥중 수기, 거짓과 진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한 두 사람의 대화, 그리고 마찬가지로 불분명한 두 사람의 정체성까지.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이고, 절대적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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