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따스한 온기로 마주한 페이지마다 참 섧다 싶은 사랑이 물씬하다!
한창훈이 사 년 만에 들고 온 이야깃거리는 단연, ‘사랑’이다. 아, 좀더 고민해보니 제목으로 쓰인 ‘연애사(史)’가 더 들어맞을 듯하다. 각각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만이 간직해온 은밀한 ‘연애사’ 하나쯤은 있을 터, 또한 ‘그 남자’가 바로 당신 혹은 나를 지칭하는 것은 당연지사. 제목만으로 이 소설집이 매우 흥미롭고 또 따끔할 것이란 걸 대번에 추측할 수 있겠다. 그것도 이야기라면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펄펄”(문학평론가 서영채, 추천사) 뛰는 소설가 한창훈이라면? 그렇다면 우리 독자는 마음 놓고 실컷 웃을 준비가, 또 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동안 그만이 독점적으로 그려내 보인 섬, 그 섬사람만의 위트 속에서 그 ‘사랑’이라는 것을 좀더 가깝게 또는 나의 개인(연애) 역사와 비교해가며 옆사람 힐끔 눈치 보며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고백하건대, 한창훈의 이번 신작 소설집 『그 남자의 연애사』 속에 부려놓은 이 여덟 편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 연애했던 당신의 연애사, 즉 우리들이 함께 견디고 건너온 ‘연애, 사(事)’인 셈이다.
숱하게 아픈 사연에도 불구하고 끝내 불행하다 말할 수 없는 건
‘사랑’이 시간이 흘러 색이 좀 바라고 모양도 좀 낡아지면 어느덧 우리들의 사랑은 어엿한 연애 일지 중 한때의 기록으로 둔갑되어지는 게 다반사였다. 그 연애의 역사를 평생 숨겨온 투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떠나버린 사람은 저만치인데 옆사람 붙들고 울고불고 떼쓰다 보란 듯 아무 일 없이 다시 또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놀라운 사랑 재생력에 한번은 눈을 번쩍 뜨고 놀랐던 적이 적잖았던 것 또한 사실.『그 남자의 연애사』 속 그런 사랑 저런 사랑 애린 사랑 떠난 사랑 등속에서 가슴 뜨끔하지 않을 사람 누구일까.
정말이지, 너무 생각이 나요. 너무 보고 싶어서 나가 꼭 죽겄단 말이요. 내 맘 아시겄소? 씨발, 죽어불믄 그 여자를 찾을 수가 없어서 죽지도 못하고. 고 가시내, 내 여자…… 사장님, 선생님. 나 그 여자 꼭 찾을 건디, 찾을 수 있겄지라우?
-「뭐라 말 못 할 사랑」 중에서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 외로움이란 게 어쩌면 사람을 한없이 순하고 원초적으로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좋아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만들었을 테니, 사랑이 뭐 별거겠나, “같이 밥 먹고 잠 잘” 사람과 함께 하는 그 단순한 이치를 몰랐을 뿐. 삶은 뭐 또 다르겠나. 사랑이나 삶이나 겪어내는 이치 또한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터.
끊임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애생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어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아마도 여자들이 모두 거기에 오아시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겠지 뭐.
―「애생은 이렇게」중에서
오아시스라 했던가. 살아 숨 쉬는 공기라 했던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우문에 현답이 소설에 살짝 들켜 있었다. 한때 우리는 사랑에 전 삶을 바쳐 죽음을 불사하고(저항하고) ‘당신’에 빠져 허우적댔다. 그런데 지금, 그 숨 같던, 오아시스 같던 그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찾으려 하면 더 못 찾아지는, 되돌리고 싶은 사랑의 과거를 다시 재현하기 위해 그는 그녀를 찾기 위해, “찾아 좀 주시오. 제발. 나는 그 여자 없으면 못 삽니다요”(「뭐라 말 못 할 사랑」)라 말해도 한번 떠나버린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당연한 이치를 왜 그때는 죽어도 알지 못했을까. 무지몽매하게 또 “우리는 왜 매번 그럴 수밖에 없는”(‘작가의 말’) 사랑에 자꾸 걸려드는 걸까. 소설 대부분의 단초를 만들어주는 대상의 부재. 그 속에서 우리는 다시 대상의 ‘잊힘’에 대해 또 생각할 뿐이다.
사랑은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인 것
사랑해야 했던 건 살기 위한 한 방편이었으리라. 숨쉬기 위해 사랑하는 것. 살아내는 의지가 만들어낸 사랑. 예컨대, ‘작가의 말’을 보자.
“사랑을 뜻하는 스페인 말이 ‘amor’이다. ‘mor’는 죽음, ‘a’는 저항하다, 이다. 사랑은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 단어를 알고 나서야 독한 불면과 눈물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람들이 거듭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참 무섭고 애끓는 것이 아닌가, 사랑은.
한창훈의 이번 신작 소설집 『그 남자의 연애사』 속 사랑 이야기는 삶과 사랑의 겸침이다. 그가 들려주는 편편의 사랑 속에는 삶의 무늬(의지)가 스며들어 있고, 우리가 겪는 삶(사랑)의 시작과 끝을 말하고 있으며 그 안에 파도치는 다양한 연애(삶의 무늬)의 형국이 섬세하게 갖가지 일화로 뻗어 있다. ‘사랑을 하자’가 ‘삶을 살자’로 읽히는 소설. 그런 연유로 이 소설집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하다가도 삶의 긍정 에너지로 가득 찬 의지를 다짐하게 된다. 외로운 사정으로 생겨난 숱한 아픈 사연들 속에서 꿈틀, 태동하는 삶의 의지. 바로 한창훈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수많은 연애사(事)를 통해 건네는 ’발로(發露)‘가 바로 그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