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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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나의 신념을 과신하지 말고, 나의 불의를 의심하라” 자신의 신념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성찰할 줄 모른다. 이들은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거를 제시해도 귀를 닫아버린다.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옳고 내가 선이라는 신념을 지켜야 불굴의 정신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과신하지 말고 내가 행했을 수 있는 불의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내가 잘못했을 수도 있음을 어째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인가? 프랑스의 철학자 제라르 벵쉬상은 “내가 정의롭다고 믿을수록, 또 이러한 믿음에 만족할수록 나는 덜 정의롭다”라고 말했다. 서로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정치적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의 감정이 여과 없이 표현된다. 이는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해 자신의 생각만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는 ‘정치적 신앙인’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정치가 종교와 다른 이유는 내가 믿는 하나의 것만이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종교화는 맹목과 맹신과 광기만을 부추긴다. 감정과 정념의 정치는 숭고한 대의로 무장할수록 극단으로 치닫게 되어 있다. 거기에는 나만이 옳다는, 그리고 너는 모두 틀렸다는 불변의 신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신념 속에서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극단과 광기가 난무하는 문재인 시대를 비판한다. 문재인 정부는 대화와 타협은커녕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행태를 계속해왔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 세력은 우리만이 선이고 우리만이 옳다는, 성찰과 회의를 모르는 독선의 정치를 해왔으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내로남불의 정치를 해왔다. ‘촛불 정부’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에서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폐라고 단죄되고, 의견이 다르면 토착왜구라고 낙인찍힌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소통과 공론의 장은 사라졌고, 서로가 극단적인 자기주장만 반복해서 외친다. 더구나 그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리더십은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보다 심하게 분열되었고, 극단의 시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는 그래도 ‘착한 권력’인데, 왜 야당을 비판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권력을 비판한다는 것이 야당에 문제가 없다는 의미는 전혀 아닐 것이다. 다만 한국 정치의 과거에 대한 책임을 보수 야당에 물었다면, 적어도 오늘에 대한 책임은 현재의 집권 세력에 묻는 것이 균형 있는 태도다. 더구나 현재의 집권 세력은 대통령, 행정부, 국회, 지방자치단체, 지방의회 등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권력이 아니던가. 그런 권력에 오늘의 현실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재인 시대의 극단과 광기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6년 말의 겨울, 나라의 기본이 무너진 상황에서 국민들은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촛불을 들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쓰일 것이라는 기대가 가슴속에 충만했다.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문재인에 대한 지지율이 80퍼센트를 넘었던 현상은 그 기대가 얼마나 컸던지를 말해준다. 정권만 쥐면 권력에 도취되는 한국 정치사의 악순환에 종지부가 찍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것이 문재인 정부의 역사적 소명이었다. 그러나 갈등은 격화되었고, 국민들은 실망에서 체념으로, 다시 절망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극단과 분열의 상처가 깊어만 가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국민들을 비통하게 만든다. 문재인 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성찰할 줄 모른다. 오직 비판자들을 악마로 만들어버리는 선악 이분법을 구사한다. 더구나 선악 이분법이 정치적 의도와 맞물릴 때 악마 만들기의 폭력은 기승을 부리게 된다.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상대방은 악마로 규정되고 돌팔매질을 당한다. 이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 사이에서 인간의 다양한 생각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본래 정치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모색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국민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서로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반목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광신적인 팬덤 정치가 낳고 있는 온갖 비이성적인 형태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시대의 이성을 욕보이고 있다. 오늘 한국 정치에서는 사실에 근거한 이성적 토론보다는 감정과 정념의 언어들이 지배하는 상황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의 기강 해이가 연이어 물의를 빚어도,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어도, 조국 사태가 일어났어도, 추미애와 윤석열이 갈등을 했어도, 민주당 광역단체장들의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어도, 입법 독주를 했어도, 결국 문제의 출발은 그렇게 단추를 채웠던 집권 세력의 책임이었건만, 좀처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제나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검찰의 탓이요, 검찰 편에 선 기레기들의 책임이며, 정권의 발목을 잡으려는 야당의 탓이다. 이들은 자신들만 도덕적으로 옳고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에 빠져 있다. 상대방의 적폐에 대해 준엄했던 정권이라면 그 이상으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들에게도 준엄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문재인은 국정 운영에서 진영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집권 초 적폐 청산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힘입어 지지율이 고공 행진을 했던 문재인 정부는 이를 자신들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착각해 모든 것을 우리끼리 해나갈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 즉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사 문제도 진영의 울타리에 갇혀 자신들끼리 국정을 운영하려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추미애와 윤석열의 갈등으로 나라가 혼돈과 분열의 늪에 빠져 있는데, 문재인은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무능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 것이 부동산 정책일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학자 존 킨은 “민주주의는 겸손한 자들의, 겸손한 자들을 위한, 겸손한 자들에 의한 통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무능하면서 겸손하지도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DNA인 것 같다. 조국과 추미애의 늪에 빠지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2021년 3월 4일 임기 4개월여를 남겨놓고 전격 사퇴했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 세력은 ‘검찰 개혁’을 주장해왔지만, 그것은 ‘검찰 장악’의 다른 이름이었다. 더구나 추미애는 윤석열의 징계를 밀어붙이기까지 1년 내내 무리한 언행을 하면서 법치의 책임자가 법치를 무너뜨린다는 비판을 초래했다. 특히 윤석열에 대한 징계는 숱한 편법과 위법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검찰 개혁은 국민적 합의처럼 되었던 사안이다. 비대한 권력이 되어 부패한 검사 감싸기를 거듭해온 검찰 권력을 개혁하자는 데 반대할 국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윤석열 몰아내기가 전부였던 검찰 개혁은 그런 국민적 합의에 심각한 균열을 내고 말았다. 그것은 순수한 의미의 검찰 개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권력에 칼날을 들이댄 검찰총장에 대한 응징이었다. 앞으로 정권 관련 인사들의 비리가 있다면, 누가 감히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더구나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훼손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검찰 개혁이라고 믿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추미애가 윤석열 몰아내기에 몰두해도 집권 세력 내에서 이를 말리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임명한 법무부 장관이 그 난리를 쳐서 민심이 등을 돌리고 있는데도, 거기에 제동을 걸지 못한 문재인의 무능과 무책임의 결과다. 민주당도 무능하고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식과 이성을 갖고 있고 민심을 무섭게 여기는 정당이라면 법무부 장관의 난폭한 언행과 법규를 무시하는 조치에 대해 제동을 걸었어야 했다. 민심의 편에 서서 조국과 추미애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