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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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지평선 안으로 사라진 당신과의 만남 조동범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금욕적인 사창가』가 문예중앙에서 출간됐다.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거머쥐며 문단에 나와 시와 평론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조동범 시인은 그동안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불모성과 황폐함을 드러내는 시편들을 발표하며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두 번째 시집 『카니발』은 도시 생태학적 관점으로 자본과 속도의 문제를 탐구하면서 불길한 죽음 의식과 팽팽히 대결하고 있다는 평을 받으며 제4회 김춘수시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이국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당신’과 ‘나’의 만남을 통해 ‘파국’을 예감하거나 반추하는 낱낱의 작품들이 퍼즐 조각들처럼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인 「금욕적인 사창가」는 프랑스의 사진작가 브라사이의 작품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인데, ‘파국’적 풍경을 효과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당신은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다. 버려진 콘돔과 무감각한 당신의 마지막 자세가,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당신의 절정은 언제나 절제되어 있으며, 당신의 어제는 금욕적인 휴일 오전을 예비하며 무감각한 절망에 침묵할 뿐이다…… 당신의 마지막 자세는 금욕적인 모든 관계와 피크닉을 상상한다……신파처럼 한 모금의 담배는 피어오르는가. 당신의 마지막 자세는 침대 위에서 고요히 울음을 터뜨리고 있구나.” ―「금욕적인 사창가」 부분 돈으로 성을 사고파는 사창가는 물질문명의 파국, (성)노동을 마치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당신과 당신의 절제된 절정은 물질문명의 파국에 의한 인간성의 파국, 당신이 당신의 자세와 분리된 건 주체의 파국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조동범 시인의 이전 작품들과 이번 시집에 수록된 작품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이어지는 작품들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과 ‘나’의 관계이다. ‘당신’은 언제나 ‘이국의 당신’이다. 당신이 ‘나’에게 이국의 당신이므로 ‘나’ 역시 당신에겐 머나먼 존재이다. ‘당신’과 ‘나’의 경계는 “사건의 지평선”(「male」)이다. 사건의 지평선을 통과한 것들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 수 없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서사”(「소녀들」)가 그렇다. 서사는 ‘파국의 서사’이다. 파국을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건의 지평선 이쪽과 저쪽에 있는 ‘당신’과 ‘나’가 만나서 접촉할 수 있는 것일까. 작품 하나하나가 영화의 숏처럼 구성된 시집의 특징상 낱낱의 작품에 제시된 정보를 상호 보완하며 읽을 때 시인이 ‘이국의 향초’라는 장치를 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국의 향초는 시차를 태우며 과거나 미래, 혹은 호명할 수 없는 것들을 홀연히 회고한다.” (「캐리어」) 엄청난 시차를 태운 ‘당신’과 ‘나’의 만남은 다른 시공간에 속한 존재들의 만남이다. ‘당신’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이미 경험하였고, ‘나’는 ‘당신’에게 기대어 당신과의 관계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한다. 우주로 확장되는 파국의 세계관 사건의 지평선을 넘나드는 ‘당신’과 ‘나’의 만남은 가랑이진 ‘나’로부터 빠져나가는 ‘당신’의 사라짐으로 끝난다. “당신은 가랑이진 나로부터 어른 어른, 공명음처럼 텅 비고 유령처럼 사라”지고(「어른 어른 그리고 어른」), “이국의 처녀들은 하나둘 옷을 벗고 가랑이진 밤을 흐느”끼는 것이다.(「출항기」) 당신의 사라짐은 ‘나와 당신’의 파국이자 ‘나’가 당신에게 의존하여 구성한 세계의 파국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곳의 문제. 시집에서는 당신과 세계의 공백을 해결하고자 이국의 공간에서 대륙횡단으로, 대륙횡단에서 행성횡단으로 시적 공간을 점차 넓혀나가며 끝없는 서사의 끝을 찾아간다. 세계의 끝으로 기차는 출발했어요. 극점을 향해 나침반은 단호했고요. 그러나 어쩌면 세계의 끝은 존재하지 않아요. 세계의 끝에는 무너진 애초와 죽어버린 부모들의 폐허가 담담했고요. 유폐된 기차를 타면 언제나 세이렌의 노래가 들려왔어요. 세계의 끝에는요. 아무도 찾지 않는 극점만이 쓸쓸하고요. 세계의 끝으로 가는 기차의 철로는 황폐한 소멸만을 기록하고 있어요. 극지로부터 이제는 세이렌의 노래조차 들려오지 않아요. 세이렌의 노래조차 들려오지 않으므로 세계의 마지막과 비극은 영원토록 끝이 없어요. 나침반은 극지를 가리키며 서글프고요. 침엽수림의 끝으로부터 치명致命처럼 세계는 소멸에 이르고 있어요. ―「대륙횡단특급 3」 부분 해설을 쓴 신동옥 시인의 말을 정리하면 이 여행은 불가능한 완결을 꿈꾸는 로드 무비이고, 로드 무비가 꿈꾸는 종착지는 바로 유토피아이며, 유토피아는 이곳에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이곳에 없기 때문에 유토피아를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토피아가 있다면 그곳은 가능성의 파국이다. 역으로 말하면 현실의 파국은 가능성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시가 일상성의 무의미한 파국에 함몰될까 언제나 두려웠고 그것을 피하고자 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야심차고 집요하게 구축한 파국의 세계는 파국을 경계한 시인의 역발상적 상상력이 극대화된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