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고 집요하게 복원한 한국 법조계 최초의 풍경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 법조계의 기원을 추적하다!
우리 헌법에 담긴 근본정신을 현대적 의미로 되살려낸 『헌법의 풍경』, 법조계를 둘러싼 모순과 병폐를 정면으로 제기했던 『불멸의 신성가족』, 그리고 영화를 통해 인권의 여러 측면을 알기 쉽게 풀이한 『불편해도 괜찮아』,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담은 『욕망해도 괜찮아』 등, 전공 분야를 넘나들며 우리 사회에 던지는 굵직하고 건강한 메시지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김두식 교수(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가 오랜 자료조사와 연구 끝에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을 펴냈다. 이번 책은 우리 법조계의 초창기 풍경임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해방 전후 법조계의 형성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진 해방공간의 법조인들을 소환해 빈 구멍을 채웠다.
김두식표 글쓰기의 특장은 전작에서도 이미 증명된바, 이 책도 복잡한 역사적 흐름과 수많은 인물이 등장함에도 특유의 탄탄한 글솜씨를 바탕으로 흡사 대하 역사 소설에 버금가는 흡인력있는 전개와 자상하고 친절한 해설, 균형잡힌 시각이 빛을 발한다. 역사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소재와 인물이 무수하게 등장하지만 모두에게 고른 각광을 비추며 공과功過를 일방적으로 단언하고 평가하지 않는 저자의 배려와 숙고가 행간에 많은 여운을 남기며 독자들의 독서 경험을 풍성하게 해줄 것이다.
당시 법조계의 풍경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사법부의 구조와 현상 등을 상당 부분 설명해주는 길이 될 뿐 아니라, 친일문제를 비롯해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전반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불멸의 신성가족’ 그 뿌리는 누구인가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은 ‘불멸의 신성가족’, 즉 우리 법조계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집요하게 탐구한 치열한 시도다. 해방전후부터 한국전쟁까지 우리나라 법조 직역의 형성과정을 ‘사람’ 이야기로 풀어가는 이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고 초창기 대한민국 법률가들을 네가지 유형으로 묶어 설명한다. 제1법률가군은 해방후 한국 법조계의 최상층부를 형성한 사람들로,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를 합격하고 일제시대 판검사를 지낸 이들이다. 제2법률가군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제3법률가군은 일제시대 서기 겸 통역생 출신으로 해방직후 판검사에 임용된 사람들이다. 해방직후 잠시 존속했던 사법요원양성소 출신 등 해방후 법률가자격을 갖춘 이들은 제4법률가군으로 분류된다. 1부부터 3부까지는 그런 법률가군들의 기원과 태생에 대해 설명한다.
‘1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은 1937년 합격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 제도를 탐구했다. 바로 제1법률가군(群) 이야기다. 일제의 법률가 선발 시스템은 판검사 임용시험과 변호사시험으로 분리 시행되다 1923년 고등시험 사법과로 통합되었다. 고등시험은 예비시험, 필기시험, 구술시험의 3단계로 진행되었으며, 학력 제한이 존재했다. 예비시험에 응시라도 하려면 중학교를 졸업하거나 그와 동등한 학력을 갖추어야 했고, 예비시험을 면제받으려면 고등학교, 대학예과 또는 문부대신이 이와 동등 이상이라고 인정하는 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경성제대와 전문학교 중에서는 관립 경성법전 졸업자만이 고등시험 시행 초창기부터 예비시험을 면제받았고, 보성전문 졸업생은 1929년, 연희전문 졸업생은 1932년에 이르러서야 예비시험을 면제받았다. 진입장벽이 그만큼 높았다. 예비시험은 논문과 외국어 두과목으로 실시되었고, 한번만 합격하면 이후에 다시 응시할 필요가 없었다.
제1법률가군의 대표적 인물이자 당대 최고의 엘리트 김영재는 안동지역 유수의 독립운동가 가문 출신으로 경성제대 재학시절 급진적 사상의 언저리를 맴돌았으나,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 이후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다. 친일 검사로 일하며 누릴 것은 다 누렸다. 해방후 반성의 의미로 좌익진영에 가담했던 ‘성찰가’ 강중인, 조선법학과동맹(법맹)을 결성한 ‘호걸쾌남’ 조평재, 반공판사로 유명했던 ‘외골수’ 양원일, 해방직후 첫번째 ‘사법파동’의 주인공인 오승근, 법조계의 모든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영광을 누린 민복기 등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의 일제시대 인생행로도 김영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부 이류에서 일류로 편입된 사람들: 변호사시험 출신들’은 일제시대 ‘이류’ 법률가로 취급받았으나 해방이후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과 함께 법조계의 가장 중요한 뼈대를 형성한 조선변호사시험출신들의 삶을 다뤘다. 제2법률가군 이야기다. 일제시대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은 이름 그대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시험이었다. 판검사가 될 수 없었던 대신 응시자격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독학자라도 이 시험만 붙으면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공부에 자신이 있는 청년들은 누구나 한번쯤 ‘독학자들의 등용문’ 조선변호사시험을 꿈꾸었다. 이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중 대표적인 인물이 허헌이었는데, 판검사를 거치지 않은 순수 변호사의 아버지 격이던 허헌은 해방후 좌익과 중도진영의 지도자로 변신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종합대 총장 등을 지냈다. 그가 왼쪽으로 기울게 된 뿌리를 탐구하는 것은 해방공간 좌익진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념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허헌의 함경도 인맥, 이종만의 대동콘체른과 맺은 인연, 해방이후 남한지역의 과도한 ‘좌익사냥’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3부 벼락처럼 찾아온 해방, 새로운 기회의 시대’는 해방으로 조선인 법률가들에게 벼락처럼 찾아온 새로운 기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본인 판검사를 재판에서 배제하고 조선인 법률가로 그 자리를 채웠다. 1945년 10월 11일 해방후 첫번째 판검사 임용이 실행되었다. 고등시험 사법과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이 이른바 ‘자격자’로서 가장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미래가 보장되었던 이들의 임용과정에서 친일경력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맥과 운이었다. 삼팔선 이북지역에서 해방을 맞이한 판검사들은 월남시기에 따라서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 출신이 요직을 독점했다.
출신지역과 좌우대립에 따른 내부갈등도 적지 않아 임용을 받고도 출근하지 않는 판검사들이 많았다. 미군정과 법조인력정책 담당자들은 빈자리를 채울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 했다. 일제시대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하며 일본인 판검사들을 보조했던 사람들이 판검사들로 임용되었다. 바로 제3법률가군이다. 일제시대 서기경력을 바탕으로 해방후 검사에 임용된 오제도와 같은 제3법률가군 출신은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판검사‧변호사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미자격자’로 분류된다.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수적으로는 판검사의 다수를 점했으면서도 실제로는 한번도 주류가 되지 못했다. 기득권을 인정받은 ‘자격자’들과 달리 제3법률가군이 권력의 상층부에 진입하려면 어떤 형태로든 자기 실력을 보여줘야 했다. 미자격자는 판사보다 검사들 중에 더 많았다.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이들의 강박은 해방공간의 무리한 검찰 사건조작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또한 해방후 군법무관으로 법조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자격자인지가 분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예 어떤 종류의 자격시험도 거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군법무관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대거 전역하여 변호사를 개업했다. 대한변호사협회나 서울변호사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서울지역 변호사는 300여명에 불과했다. 100명에 육박하는 군법무관 출신들은 결코 작은 세력이 아니었다. 1960년 10월 고등시험 사법과, 조선변호사시험 등 이른바 ‘정통 고시’ 출신들은 “서울변호사회가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들에게 좌우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변호사들의 질적 저하가 초래되고 있다”면서 새로운 변호사회인 서울제일변호사회를 창립했다. 1980년 통